죽거나 죽이거나 Ⅰ
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9
22.
조함장은 멤버십토토이 그날 밤 당장 쳐들어올 줄은 몰랐다. 왕복 이십 킬로가 넘는 험한 산길을 그것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다녀온 탓에 무척 피곤하였다. 그래서인지 저녁을 먹고 나자 졸음이 쏟아졌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최항해사나 같이 원정을 다녀온지상족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지상족 마을에 깊은 어둠이 깔렸다. 그들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
김박사는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고 있었다. 이것저것 잡생각에 머리가 복잡하였고,그날따라 유난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레나는 김박사 품에 안겨서김박사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한참 동안 종알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 김박사는 어둠 속에 흐릿한 음영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윤곽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둔부에서 멈추었다. 마치백자 달항아리를 뉘어놓은 듯 둥글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 그리고 그 사이의 은밀한 계곡.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김박사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김박사는 모든 게 꿈같았다. '어쩌다 블랙홀에 빠져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옆의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와 어떤 인연이길래 이렇게 함께 누워있는 걸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김박사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레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돔 밖은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떠있고,밝은 달이 은은하게 비추고,선선하게 부는 바람까지 더해져 한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운 밤의 모습이었다. 김박사는 그런 평화로움이 오히려 불안하였다. '이곳은 정말 평화롭고 행복한 곳인가? 이 평화가 여전히 계속될 수 있을까? 조함장이 말하는 멤버십토토만 없어지면 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살게 될까? 혹시 우리가 이들의 세계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아닐까?' 김박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뭐가옳은지 아닌지. 김박사는 한참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밤이 깊어가고 한밤중으로치닫는 시간,지상족 마을로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멤버십토토이었다. 모두 창을 하나씩 들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 코를 벌름거리며, 튼튼한 다리를 부지런히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 무리 중 우두머리인 붉은수염 옆에 짝귀라고 불리는 심복이 있었다. 동료와의 서열 싸움에서 한쪽 귀를 잃었는데, 그는 싸움보다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자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동료들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지상족 마을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살육을 벌일 것이 분명한데,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될 일이었다. 지상족은 자신들의 먹이였다. 그냥 죽이면 끝이 나는 적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면 그 많은 양을 먹을 수도 없으려니와 자신들의 본거지로 옮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 죽여버리면 앞으로 고기맛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놈들을 절단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제가 필요했다. 최대한 필요한 만큼만 생포해서 끌고 가야 할 것이었다. 그가붉은수염에게 말했다.
"대왕님, 오늘은 지상족 놈들 사십 마리만 생포해서 끌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두고두고 먹을 양식인데 모두 죽여버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짝귀, 네 말이 맞다. 내가 큰 실수할 뻔하였구나. 암컷 수컷 반반씩 해서 사십 마리만 잡아가자. 암컷 고기가 맛있다고 암컷만 잡지 말고. 암컷은 새끼를 낳아야 하니 암컷 씨를 말리면 안 될 것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왕님."
그들은 마치 자신들 소유의 목장에서 원하는 만큼의 양들을 포획해 가는 듯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귀의 존재가 지상족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단은멤버십토토이 지상족을무분별하게 살육할 위기는 모면한셈이었다. 붉은수염의 명령이 부하들에게 전달되었다.
"가급적 상처를 입히지 말고 생포할 것. 암컷 수컷 골고루 섞어 사십 마리만 포획할 것."
23.
그날밤, 멤버십토토은 지상족 주민 사십 명을 끌고 갔다. 그리고 보초를 서던 지상족 젊은이 세명을 죽여 장대 끝에 매달아 놓았다. 대신 자기들 동료 둘의 머리는 수거해 갔다. 그야말로되로주고 말로 받아간 셈이었다.
지상족 마을을 습격할 때 짝귀가 다시 아이디어를 내었다. 무분별하게 공격하면 아군의 피해도 있을 것이고,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이방인이 있는 한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먼저 소수의 정찰조를 보내 지상족 마을의 동태를 살피자고 하였다. 붉은수염의 명을 받은 정예병 여섯이 은밀하고 민첩하게 지상족 마을로 접근하였다. 과연 마을 앞뒤로 지상족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라고 해봤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다였지만. 그들의 턱밑까지 은밀하게 접근한 멤버십토토은 단숨에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비록 조함장 지시로 울타리를 높고 튼튼하게 보강하였다고는 하나 힘세고 날랜 멤버십토토정예병에게는 큰 장애물이되지 못하였다. 울타리를 뛰어넘은 멤버십토토은 게슴츠레눈을 뜬 경계병 가슴에창을깊숙이 꽃아 넣었다. 애당초 지상족은멤버십토토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지상족경계병은 대항하기는커녕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그냥 눈앞에 멤버십토토의 험상궂은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가슴에 불같은 뜨거움이 느껴지고 그걸로 시간이 정지해버렸다.
지상족 경계병 세 명이 창에 가슴이 꿰어 죽고, 한 명은 창대에 목덜미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이어서 정찰조의 신호를 받은 멤버십토토 본대가 도착하였다. 그들은 기절한 경계병을 깨워서 그가 살고 있는 돔의 출입문을 열게 하였다. 우르르쏟아져 들어간 멤버십토토들은 각 방마다 쳐들어가 잠들어 있는 지상족들을 덮쳤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었다. 주위에깨어나는 지상족들이 있으면머리를 후려쳐서 기절시켰다. 그렇게 남녀 사십 명을 채운 멤버십토토은 하나씩 둘러메고 신속하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안전하다 싶은곳에 도달한 멤버십토토은 지상족을 내려놓고 마치 굴비 엮듯이 밧줄로 줄줄이 묵었고,채찍을 휘둘러 발길을 재촉하며 끌고 갔다. 그리고 그날 동트기 전 지하세계에 도착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이고포식하였다.
희망호 승무원들은 멤버십토토이 떠나고 난 한참 후에야 그들이 쳐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이 침입한 돔은 희망호 승무원들이 없는 곳이었다. 지상족 마을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김박사 일행이 습격당한돔을 찾았을 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머리와 얼굴이 터져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부자리와 바닥 여기저기가 핏자국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부모 모두 끌려가고 혼자 남아 엉엉 우는 아이, 남편이나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그들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주민들. 조함장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자책하였다. 다 자기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것 같았다. 만에하나라도 멤버십토토이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했어야 했는데, 그만 방심하였다. 원시인 같은 놈들이라고 그들을 얕잡아 보았다. 조함장과 최항해사는 급하게 레이저건과 야간투시경을 챙겨 들고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산능선까지 올라가 확인해 보았으나 멤버십토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마을 주민들은 멤버십토토이 장대에 매달아 놓고 간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였다. 죽은 자의 가족들이 펑펑 우는 가운데, 족장 아마라주도로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장례라고 해봤자 시신을 노란 새 원피스로 갈아입히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영혼이 연기를 타고 하늘나라로 빠르게올라간다고 믿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주위를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았다.죽은 자의 영혼이 무사히 하늘나라에 닿기를 빌면서.
24.
조함장은 다음날 바로 지상족 젊은이들을 이끌고 멤버십토토 본거지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상족 사람들이 겁을 잔뜩 집어 먹어 사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나 동료가 그렇게 희생되었으면 복수심에 불타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그들은 달랐다. 평화롭게 농사만 짓고 살던 그들은아예 멤버십토토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못하였고,오히려 자기들의 운명이려니 하고받아들이려는 것 같았다.그동안창과 칼을 만들고 멤버십토토 모형에 창을 꽂는 연습을 하였던 게 다 허사였다. 게다가 마을 원로들 사이에서 조함장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조함장이 그렇게 까지 일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이번과 같이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한두 명씩 잡혀가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하였다.
조함장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만회해야만 했다. 지상족젊은이들을 동원하기는 틀렸고, 일단 희망호 승무원들만으로 멤버십토토 소굴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어쩌면 오합지졸보다 소수의 정예병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조함장은김박사와 이박사에게 같이 동행할 것인지의견을 물었다. 김박사는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박사가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았고 타 생명체에 호기심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임에도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김박사도 동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레나와 레나 부족의 생사가 걸린 일인데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여 지상족 부족들은 빠지고 희망호 승무원들만원정길에 올랐다.
여섯 명 모두 단단히 무장하고먹을 것도 챙겨서길을 나섰다.레나가 쫒아나와 김박사 품에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김박사는 별일 없을 거라고 그녀를 다독이고 나서 저만치 앞서가는 일행을 바쁘게 쫓았다. 멤버십토토 본거지까지는한번 갔던 길이라시간이 단축되어세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지난번과 달리 멤버십토토 소굴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놈들도 지상족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이제어떻게 한다?조함장은 잠시 생각한 끝에 두 명씩 나누어 주변을 수색하기로 하였다. 그놈들도 숨을 쉴 것이고 어딘가에 환기구가 있을 것이었다. 정면돌파보다는 일단 우회 침입로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한 시간여 수색 끝에 커다란 바위밑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접근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지하세계로 통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구멍이 작아 그들 중 그곳을 통과하여 지하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에 지상족과 함께 오게 되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 말고도 몇 군데 더 발견하였는데 크기가 다 고만고만하였다. 우회로를 포기하고 모두들 다시 출입문앞으로 모였다. 조함장은 여기까지 온 이상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며정면돌파를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입구 틈에 폭약을 설치하고 타이머를 작동시킨 후 모두 물러나와 바위 뒤로 숨었다.
"콰쾅!"
돌무더기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시커멓고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조함장이 레이저건을 치켜들고 앞장을 섰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동굴 전체가 쩌렁쩌렁 진동하는큰 폭발음에 놀란 멤버십토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이곳저곳에서 뛰쳐나왔다. 아마도 태어나서 그렇게 큰 폭발음은 처음 들어볼 것이었다.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쏟아지는 건 무차별적인 총격이었다. 그들의 이마며 가슴에 빨간 불빛이 비치는가 하면 여지없이 구멍이 뚫리고 피가 솟구쳤다. '악!' '으악!' 비명과 함께 멤버십토토이 픽픽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연이어 나오는 멤버십토토 역시 피를 쏟으며 동료의 시체 위로 엎어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멤버십토토이 정신을 차렸음인지 희망호 승무원들 쪽으로 창이 몇 개 날아들었다.그것을 본 조함장이 철수지시를 내렸다. 그 상태에서 더 지체하였다가는 멤버십토토의 반격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어림잡아 백 명 정도의 멤버십토토을 사살하였으니 지상족 희생자들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하였다. 조함장 일행은 신속히 멤버십토토 소굴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놈들의 창이 몇 개 더 날아왔지만 위협적이지는 못하였고, 땅굴 밖으로 쫓아 나오는 놈도 없었다. 조함장 일행은 날이 저물 무렵 의기양양하게지상족 마을에들어섰다.그들 뒤로 핏빛 붉은 노을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1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