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 극복하기
사람이 몇 안 되는 늦은 시간 카페에 들어선다. 카페에 앉아 늘 마시는 따뜻한 라떼에 샷을 하나 추가했다. 기분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맛이다. 사흘 만에 마셨더니 더 깊게 느껴진다. 고맙게도 커피는 밤에 마셔도 잠은 잘 찾아오는 편.
돌아보면, 나이 들수록 나의 시간은 허투루 흘려보내는 일이 없이 빼곡하게 꼭꼭 들어차있다. 뭐든 빼먹는 일들도 허다하고 구멍 송송인데 그래도 늘 허둥지둥 해야할 일 리스트가 머릿속을 뱅뱅거린다. 일부러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몸을 뉘지 않으면, 일부러 카페나 도서관에 들어가 앉지 않으면 마음 정리할 틈이, 쉴 틈이 없다. 나이 들수록 배터리 수명이 짧아지듯 하루 내 몸의 방전 시간도 짧아져간다는 걸 느낀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읽어야지,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햇볕이 따사롭게 들어와 앉았다. 아,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턱을 괴고는 잠시 눈을 감으니 금세 잠이 들었다. 아주 짧은 칼리토토임에도 노곤노곤 피로가 물러난 기분에 좀 살 것 같은 맘이 든다.
쉼이 필요했던 걸까? 마음을 끌어올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둘째 칼리토토에게 곤두서 있던 마음으로 더없이 피곤했던 며칠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밤늦게까지 뭐 하고 자기 전에 나와서는 숙제한단다. 도와 달래 놓고 짜증이다. 연필 심지 끄트머리까지 잡고 글씨 쓰는 칼리토토에게 연필 잡는 법을 고쳐 알려준다.
잘만 써지는데 왜 이래요?
뭐가 이리 화가 날까? 같이 독후활동이라도 하려다가 나도 때려치운다. 사춘기칼리토토의 엄마는 그저 하루에 한 번씩 때려 맞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유명 강사가 말했던가. 그나저나 연필도 제대로 못 잡는 녀석이 무슨 사춘기냐.
생각하니 갑자기 카페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진다. 콧물 눈물 범벅되어 티슈를 자꾸 눈으로 가져가며 훌쩍댄다. 이렇게 카페에 늦은 저녁, 곧 마감인 카페인데도 굳이 들어선 이유가 있었지. 울고 싶었으니.
며칠 전 친정에 처음으로 혼자 운전해서 다녀왔다. 운전도 싫어하지만 장거리 운전은 한두 칼리토토 겨우 하는 편이라 서너 칼리토토인 친정까지의 거리는 그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정을 앞두고 남편이 갑자기 아픈 바람에 긴 연휴, 기차표도 매진이라 처음으로 용기 내 보았다.
오가는 길, 제법 빠른 속도에 긴장도 했거니와 칼리토토들과의 시간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작은 공간, 오랜 시간 동안 티격태격하며 깐족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 참고 돌아서고 혼내고 넘어가고 혼내고 수십 번 이러다가 막판에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는 왜 이렇게 날 슬프게 하는가
겨우겨우 집에 이르러 짐을 올려다 놓고 남편이 칼리토토들 밥 차려주는 거 보고는 도망치듯 나섰다. 그래놓고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칼리토토들에게 소리친 것부터가 마음이 아프다.
다시 너 데리고 어디 안 다녀!
이제 말 걸지 마
유치하게 칼리토토에게 뱉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칼리토토의 머릿속에도 남아있으면 어쩌지? 이럴 거면서 왜 그랬냐.
그나저나 칼리토토는 뭘 그렇게 잘못했나.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 칼리토토가 할머니에게 솥밥 먹고 싶다고 해달라는 말을 듣고는 귀여워서 아직 비몽사몽 중인 칼리토토에게 다가가
아가, 솥밥 해달랬어? 솥밥이 먹고 싶었던 거야?
이러면서 안으려고 했는데 짜증을 낸다. 잠결에 귀찮았나 보다. (그냥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 어물어물 대답하다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재차 물으니 내 손을 확 밀어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못 들었으면 말아요.
나의 다정이 상처로 돌아왔다. 상처받은 나는 또 토라지고 만다. 곧 다시 돌아와 별일 아니라는 듯
엄마 미안해요. 꿈꿨었나 봐요.
잠꼬대였어요.
투명한 거짓말을 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그렇게 쉽게 어물쩡 넘어가는 것을 나는 더 참지 못하겠다. 쩨쩨해지는 마음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막내가 그릇을 깨 주섬주섬 식탁 아래를 정리하는데 둘째 칼리토토가 말을 건다.
"엄마 운전하느라 힘들었는데 또 치우느라 힘들겠어요."
옹졸한 나는 당장은 칼리토토의 말에 대꾸도 하고 싶지 않다. 너에게 이미 상처받았으므로. 하지만 이내
나의 문제는 아닐까
내 마음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왜 그럴까
이 글은 나의 공간에서의 글이므로 나를 충분히 포장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만 쏟아내는 말일수 있다. 너의 뾰족한 마음이 온전히 내 안에 담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 칼리토토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칼리토토의 인생 중에 단 한 명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칼리토토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 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칼리토토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말대로, 칼리토토은 결국 사랑을 먹고산다는 것이 카우아이 섬 연구의 결론이다. 아이는 사랑 없이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 먹고 자라야 아이는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아존중심을 길러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의 근본임을 카우아이 섬 연구는 알려준 것이다.
김주환, [회복탄력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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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칼리토토 섬에서 행해진 연구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 자란 칼리토토들 중 1/3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났는데 이유는 바로 칼리토토를 받아주는 무조건적인 어른 1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는데 지금도 늦지 앉았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갈피를 못 잡는 내게 바늘구멍사이로 자그마한 빛이 새어든다.
그 한 칼리토토 둘째 아이에겐 있었을까?
조금 억누르고 참아내며 이 칼리토토에게 단 한 명이 되어주어야 할 텐데, 네 스스로 사랑받는 칼리토토임을 알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너에게 단 한 칼리토토 되어주어야 할 텐데...
누구보다 소용돌이치는 감정 틈바구니 속에서 네가 가장 힘들텐데...
이 사랑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랑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막연함을 담요처럼 두른 채, 물음표 몇 개 던져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