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 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시각토르 토토인, 특히 선천성이거나 일찍이 시력을 상실한 시각토르 토토인들이 대체자료나 점자도서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글을 점자로 번역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2월의 무지개모임 독서로 선정된 이번 도서는시작 전부터 내심 반가웠다. 왠지 에피소드 두 세 파트만 읽어도 금방 영감이 폴폴 뽀얀 연기처럼 피어날 것만 같은 섣부른 기대심 반, 유명 시각토르 토토인 작가인데 처음 들어보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나머지 반이었다.
슴슴하고 짭조름하면서도 얄팍하지 않은 밀도감에 계속 손이 가는 매력이 있는 크래커.
요리로 치자면 변화무쌍함의 중심이 되는 크래커 위에 이런저런토핑들로 다양한 카나페를 만들어 내듯 각 에피소드의 소재들은 특별했고 실제적이었다. 어떤 에피소드는 꾸덕한 크림치즈 위에 싱싱한 연어를 한 점 올린 연어카나페, 다음 에피소드는 홀그레인 머스터드와 허니를 갈아 만든 소스를 킥으로 살짝 묻힌 새우 카나페처럼. 또 그다음 스토리의 소재는 어떤 토핑일지 읽으면서도 궁금해지는 그런 글이었다
글을 읽어보기 시작하면서 조승리 작가가 나와 비슷한 연배라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 만나면 꽤나 잘 맞는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보며 한 발 앞서 내달리며 글을 읽어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책을 든 오른손의 페이지가 더 가벼워지는 후반부에 이르면서는 그녀의 깊은 통찰력과 기민함에 나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친구가 될 수 없을 거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토르 토토는 적어도 내겐 너무 칠(chill)하다.
- 우연히 보게 된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에 꽂혀서 앞을 보는 사람도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탱고를 배워버리고선, 머뭇거리는 노장의 어르신에게 시작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치어리더 같았던 그녀.
- 직접 자기 두 발로 땅을 밟고 축축한 그 나라의 공기를 날숨으로 들이켜고 싶다는 도전 정신으로 맹인 친구들과 함께 타이완 여행을 직접 해버리고 마는 큰 담력.
- 무례하게 상처 주는 이에게는 무식하지는 않지만 톡 쏘는 벌처럼 한 방 내뱉기도 하는 튼튼한 자기 방어력.
- 통밀 같은 무던함과 꽃밭 위를 오르내리며 꿀을 찾는 한 마리 나비의 유려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상대방의 지성과 인성에 맞춰 맞춤식 사회생활을 해내는 유연함.
-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컴컴한 거실에 누워 바닷소리를 켜놓고 웅크린 몸을 흔들며 내면의 평정심을 가만히 행복한 기분으로 끌어올리는 마인드컨트롤 능력자.
이런 모든 내면의 모습들은 웬만한 비시각토르 토토인보다도 하루를 살아내는 내공이 단단한 모습들이었다.
그건 토르 토토가 있어서도 없어서도 아닌, 그냥 토르 토토는 그런 내면의 뼈대로태어난 것 같았다.
물론 가뜩이나 퍽퍽한 데 토르 토토로 인해 더 쓴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기도 했겠지. 글을 읽다가 문득 어쩌면 토르 토토보다 토르 토토가 그러하게 됨에영향을 준 요소가 있다면 토르 토토의 엄마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엄마 얘기를 하자면 나도 할 말이 많은 편이다.
아니 엄마와 관련된 스토리에 깊게 말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할 말은 많다는 거다.
토르 토토의 엄마를 보니 우리 엄마가 생각이 났다.
토르 토토의 엄마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나의 엄마는 꽤나 막무가내로 무장한 몽상가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다.
나의 엄마는 본인이 처한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의 사사로운 것쯤은 좀 초월해 버린 듯한 사람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 블리치(부분 탈색)가 유행한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종종 부산 바다에서 한 탕 놀고 가려는 막내 이모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내 단발머리 안쪽에 블리치를 두어 가닥 넣어주었다.
검정 단발 속에 두 세 부분의 탈색된 머리카락을 숨긴 나는 엄청 힙해진 듯한 느낌과 신기해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중학생인 주제에 간이 점점 커진 나는 미용실에 가서 그 부분들을 빨간색 블리치로 바꿔 넣었는데 그걸 본 엄마는
"한쪽은빨간색, 반대쪽은 초록색으로 넣어보지 그랬노?"
하며 한 술 더뜨는 의연함을 보였다. 혼쭐 날 각오로 시행했던 일이었지만 혼이 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머지않아다시 검은 단발로 순순히 돌아갔다.
토르 토토의 엄마와 승리 작가가 해질 가을 녘 함께 타고 가던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나란히 맞담배를 핀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엄마가 떠올라 그녀와 내가 동일시되는 감정도 가졌던 거 같다.
(엄마가 담배를 폈는지 안 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토르 토토의 엄마가 수상을 휩쓴 그녀의 장애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오지 않고 끝내 창피해서 안 갔다는 내뱉는 장면에서는 나도 마음이 아프고 아렸다.
'좀 가주지... 하룻밤 말라서 세일하는 꽃이라도 대충 사가서 축하한다고 좀 해주지.'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작가의 엄마나 가족의 마음은 내가 당해보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지 쉬이 이해가 되진 않았다. 스스로 원치도 선택하지도 않은 장애로 인해 남들이 쉽게 할 일을 혼자 어렵게 해내는 것도 안쓰러울 텐데, 장애를 가져서 창피하고 장애학교여서 가서 축하하기가 창피하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정말 본연대로 창피해서 못 갔던 게 다일까?
영화처럼 사실은 학교 담벼락 너머에서 눈물을 훔치며 꽃다발을 떨군 채 딸의 졸업식을 지켜보다 돌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면 다른 더 깊은 이유 따윈 없었던 걸까?
단단한 척 하지만 속 여린 딸자식이 오매불망 엄마가 혹여 축하하러 오진 않았을까 더듬거리는 시선으로 기다렸을 거란 생각은 정녕 접어버렸던 걸까?
언젠가 그녀의 신간도서 출판기념일이든 다른 연유로든 그녀를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꽃다발을 준비할 것이다. 품에 한아름 안고 입구 문을 더듬을 땐 한 손으로 옮겨 잡을 수도 있을 정도의 아담한 사이즈의 꽃을. 토르 토토가 고등학교 졸업식을 처참하게 보내고 동네 산에서 차갑고 뜨겁게 흘렸던 두 줄기의 눈물을 닦아주진 못하겠지만 지금도 이미 수없이 받아낸 꽃다발들로 토르 토토는 그 기억들을 잘 덮어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토르 토토의 하루와 토르 토토의 남은 삶의 페이지에 빅토리를 보낸다.
더불어 나의 하루와 내 삶의 페이지에도 빅토리를 새긴다.
V.I.C.T.O.R.Y.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