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vs 올림피아토토, 승자는요?
K 씨 나이 32살 내 나이 27살, 만 나이가 적용되기 전이니 현재의 나이 계산으로 따져보면 숫자적으로는 더 파릇한 나이에 우린 부부가 되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를 올림피아토토하겠습니까?”
여느 아침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은 흔하디 흔한 주례 선생님의 물음에 우리는 인생 최대 미션을 부여받은 듯 비장하게 대답했다. 힘찬 공식선언과 함께 내 올림피아토토이 된 K 씨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힘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반백발인 상태였는데, 주례사에 따른다면 그는 남은 검은 머리의 숫자만큼 밖에 날 사랑할 수 있다는 건가, 시답잖은 의문이 시작된 건 순전히 애먼 긴장감 탓이겠다. 맥락 없이 그와 나 사이에 끼어든 물음은 자근자근 성실히도 자리 잡아 화근이 되기 일쑤였다.
올림피아토토준비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자기주장이 강한 시어머니와 딸 가진 것이 죄스러운 듯 유야무야 한 태도의 어머니를 상대하는 것이 퍽 고단했다. 예식장 예약, 신혼여행지 결정 등 줄줄이 이어지는 선택의 순간에 내 목소리 하나 얹어 내기가 어려웠다.
퉁퉁거리는 나에게 K 씨는 “나중이 편하려면 지금은 조용히 있자”며 그저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듯 말했다. 그 말에 홀딱 넘어간 내가 잘못이지. 나중이 편하다는 말이 어디가 미더웠을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의심치 않고 따른 내가 팔푼이다. 이때부터 내편 아닌 남의 편인 낌새를 알아챘다면 덜 기대하고 덜 바랐을 것을, 언제나 깨달음의 속도는 더디다.
낌새의 본격적 시작은 첫 아이의 임신을 확인한 때였다.
본디부터 가진 것 없던 우리였음에 ‘삶의 지분을 부모님과 나누지 말자’는 슬로건을 앞에 두고, 어쭙잖은 자존심까지 챙기며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돈이 신혼집에 흘러들어왔다면 투룸 정도 얻을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물정 어두운 부부는 원룸과 아파트의 간극을 알지 못했다. 그저 둘이 함께 누울 침대만 있으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한 집에 살기 시작한 지 갓 한 달을 넘길까 말까 한 때, 울렁거림과 울적함이 뒤엉키고 겨우 넘긴 것을 목구멍 밖으로 밀어냈던 날, 몰래 약국으로 달려가 사온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본 순간, 나는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막았다. K 씨를 놀래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여 화장실 선반 위에 슬쩍 올려두고 나왔다. 저것을 언제 볼까, 어떤 반응을 할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설레발을 쳤더랬다. 그런 나의 부산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식 없는 그의 뇨기(尿氣)에 다문 입술은 터질락 말락,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인내심이 바닥날락 말락. 순간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K 씨의 발걸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닫힌 문 앞을 서성였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난 지 하세월이건만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쁨의 소리도 낭패스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좀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든다.
이윽고 문 밖으로 나온 그의 표정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뒤섞인 것이었다. 서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울컥거림이 솟구쳤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예상치 못한 소식임을 인정한다. 나조차도 어렴풋한 두려움으로 멈칫하였는데 당신이라고 달콤할 재간이 있나. 뒤늦은 감사와 축하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 울음소리만 귀에 울렸다.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나를 주섬주섬 추스르며 K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이라 너무 놀라기도 하고,가장이란 말이 실감나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어.”
수긍이 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박자 늦은 공감이었다. 주인 얼굴 할짝거려 주는 강아지가 더 위로가 되겠다. 그저 안아주고 보듬어주기만 했어도 행복이 잔뜩 부풀어 올랐을 텐데.
임신기간 중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짧지 않은 연애기간 동안 적지 않게 싸운 우리였지만, 임신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걸맞게 뜻 없이 툭툭 불거지는 내 성질머리로 서로를 더 지쳐했던 어느 날이었다. 시댁에 다녀온 날은 유난히 더 뾰족해지는 만삭의 임산부는, 여지없이 그날도 시어머니가 던진 말을 꼬깃꼬깃 가슴에 구겨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 둘은 마트에서 장을 보며 낮 동안의 일을 되감기 하는 중이었는데 K 씨는 ‘네 말이 맞다’라고 맞장구 쳐주지는 못할망정 ‘네가 이상한 거다. 좀 잘해라’라며 불씨를 당겼다. 얼씨구, 내 귀가 고장 난 건가. 분명 제대로 들었다. 열불이 나서인지 만삭의 몸 상태 때문이지 가슴이 할딱거렸다.
장 본 것을 계산하느라 분주한 K 씨를 두고 잰걸음으로 마트를 빠져나왔다.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한 나름 계획적인 도주였다. 뒤뚱거리는 배부른 여자의 속도가 뛰어봤자 얼마나 빠르겠는가. 최대한 그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캄캄한 골목을 부러 찾아 숨어들고 뒤쫓아 나온 K 씨를 따돌린 야밤의 숨바꼭질 한 판. 구석진 골목을 돌아다니며 묘한 해방감과 승리감을 느끼는 것도 지루해질 때쯤 개 짖는 소리가 지척인 듯하다.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도 들려온다. 잘도 따돌려 버린 올림피아토토이 몹시 궁해진 순간 굳어진 배가 느껴졌다. 들끓은 마음 때문인지 배 뭉침의 세기가 평소와 다르다. 여지껏 두 배의 덩치가 된 부인도 못 찾는 올림피아토토도 밉고 제 발로 집을 찾아가는 것이 과히 자존심 상했지만, ‘나도 좀 쉬자.’라는 아기의 요청을 들을 수밖에.
엉거주춤 집에 들어서자 K 씨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나를 왈칵 끌어안았다. 설거지하며 반성 중이었다는 그를 뒤로하고 침대에 누우니 뭉친 배는 말캉말캉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내 편부터 들겠다는 각서를 그때 받아두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K 씨는 그의 테스토스테론 수치와 걸맞게 왕성한 사회활동을 즐겼으므로 으레 모임도 잦았다. 어느 가족 모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하얗게 웃던 그의 표정과 빨갛게 구겨진 나의 얼굴이 여태 선명하다. 방향 없이 흐르던 이야기가 여느 때처럼 아이들 이야기로 모아졌다. 딸이 귀한 모임이었는지 누군가가 아들, 딸 있는 K 씨에게 물었다.
“딸 키우는 건 어떤 느낌이냐? 아들이랑은 다르지?”
“야, 딸은 아빠의 마지막 사랑인 거다.”
그가 아들 키우는 것에 어떤 평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롯이 활짝 핀 꽃송이 같던 그의 얼굴과 달달하다 못해 녹아내리는 그의 목소리만 남았다. 우리의 딸로 말할 것 같으면 제 부모랑은 달리 어디 하나 안 예쁘고 모난 구석이 없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최고로 사랑스러운 아이임이 분명하다. 나에게도 딸은 세상의 귀하고 좋은 것을 다 붙여도 표현이 안될 만큼 소중한 존재이지만 올림피아토토의 대답은 타격감이 컸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랑인 거야?’ 올림피아토토이라는 형태로 엮어져 있는 지나버린 사랑인 건가. 애꿎은 질투심과 죄책감을 동반한 부끄러움이 내 안에서 일었다. 대상을 잃은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옮겨 붙지 않게 차가운 술을 삼켰다.
올림피아토토에게 잘해줘야 아무 소용없다, 어차피 마지막 사랑은 정해져 있는데 뭘 바라냐, 나의 마지막 사랑도 너 아니다. 이런 말로 며칠을 K 씨를 들들 볶고 나서야 내 나름의 만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개가 K 씨 보다 낫다 싶은 순간은 찰나일 뿐이다. 내 곁에 나를 여지없이 반겨주는 개만 두었다면 스스로의 모난 구석도 모르는 오만하고 웃자란 내가 되었을지도. 한 서운함이 끝나면 다음 성남이 있었으나, 그 곁에 사랑도 있었기에 나는 겨우 어른흉내를 내며 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때때로 ‘개 보다 못하다’ 외치다가도 ‘개 보다 낫네’라고 끄덕이는 무수한 호시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맺어진 우리. 흐르는 삶 속에서 도통 누구 편인지, 시시한 사이가 돼버린 것인지 헛갈리기도 하지만 역시나 당신은 나에게 귀여운 반려견이 아닌 애중하는 반려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