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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14. 2022

바로벳 바로벳 바로벳 쌤~


"난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늘땅만큼~~

엄마가 보고 싶음 달릴 거야. 두 손 꼭 쥐고.

바로벳 바로벳 바로벳 하니. 이 세상 끝까지 바로벳 하니"


1988년에 제작된 국민 애니메이션 만화 <달려라 하니. 그 시절에도 본방사수는 필수였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달리는 하니를 보면서 마음에 답답함이 일렁일 때면 굽이 굽이돌아야 집 한 채가 겨우 있는 시골길을 뛰곤 했다. 마음껏 뛰는 것만큼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자신감이 넘쳤다. 키는 작지만 가볍고 날렵했던 덕에, 달리기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 중 하나가 되었고, 초등학교 운동회의 꽃, 릴레이 계주 선수에도 번번이 이름을 날렸다.


엄마가 된 이후에도 매일 같이 뜀박질은 계속됐다.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반은 족히 걸리는 퇴근길,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 끔벅끔벅 졸고 있을 아이가, 말도 잘하지 못하는 아이가 친구들 가는 뒤꽁무니만 보고 있노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전철역까지 쏜살같이 뛰곤 했다. 학교에서 전철역까지 길은 작은 언덕(그래도 시멘트 길이지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었는데 그 길을 뛰어가노라면 멀리서 날 바라본 선생님이 다람쥐 한 마리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았다고...


두근두근.

어느 날 나만의 '달리기 솜씨'를 뽐낼 날이 불현듯 찾아왔다.

인생사 뭐든 쓸만한 구석이 있다더니..


매일 같이 학교에 지각하거나 결석하기에 바빴던 아이. 수업을 듣다가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잠시 잠깐을 참지 못하고 상담실을 불쑥 찾아오는 아이가 있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 한가득 눈가에 담아, 실실 웃으며 "쌤쌤! 저 간식 주세요! “ 소리쳤던 아이. 가무잡잡한 피부에 길들여지지 않는 망아지 한 마리를 마음속에 키우고 있었던 아이....


그날은 해가 짱짱하다 못해 더운 열기로 정오가 되기 전에도 학교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업을 듣다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답답하고 짜증 나는 마음을 참고 참다 폭발하듯 씩씩 거리며 바로벳가 내려왔다. 냉수 한 사발을 대접하며 진정시킨 후, 다시 수업에 올라가자고 이야기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여기며...


"샘! 저 오늘은 그냥 집에 갈래요!"

"뭐? 지금 수업 가야지. 이제 2교시인데. 샘들 걱정하실 거야."

"싫어요! 저 그냥 갈래요."

"... 00야.. 그러면... 담임 쌤..." 라고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뛰쳐나간다.


2층 상담실을 빠져나가는 바로벳의 뒷덜미! 확!

낚아챘음 얼마나 좋았으랴마는.


'일단 잡아채리라!'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뒤따라 나섰다.

당당히 바로벳의 뒷덜미를 잡아 교실에 앉히리라. 담임 선생님과 교감, 교장 선생님 앞에서, 당황한 바로벳 옆에서 승리의 미소를 보이리라!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고 다람쥐처럼 따라나갔다.

낄낄! 너는 곧 나에게 잡힌다!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어허! 벌써 현관문을 지나갔단 말이지!!


현관문까지 부리나케 뛰어나갔는데... 바로벳가 보이지 않는다. 이건 내 시나리오가 아닌데..

"**야!!!!!... 가지 마!!!"

헤어진 연인을 붙잡는 마냥 애절하게 바로벳의 이름을 부른다.


"쌤! 내일 봐요!!!"

회심의 미소를 보내는 바로벳(그 미소는 내가 했어야 했단 말이다!!)

"안돼!~~~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아직 너를 위해.. 갑자기 브라운 바로벳즈 노래가 생각나는 건 왜?? 왜?) 나 혼자 남겨두고 제발 제발 제발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야광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학교 교문을 뛰쳐나갔다. 그 햇빛 아래 유난히도 빛났던, 임용 준비할 때 애용했던 그 야광 형광펜 색인 운동화.


앗! 아까비. 나도 운동화를 신었더라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굽 높은 아줌마 실내화를 신어서라고! 앞이 휑하게 뚫린 아줌마 실내화를 신어서라고!


....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10대, 릴레이 선수 마지막 주자였던 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바로벳 둘 낳은 아줌마는... 10대 창창한 중학생 남자바로벳를, 아무리 비실해 보여도 잡을 수가 없구나!

..........


처참히 무너진 채, "바로벳가 상담 도중 튀었습니다."라는 보고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비참함이 아직 남아있다.

전문상담교사는 학교에서 상담만 하는 건 아니다. 상담 외에 해야 할 일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달리기도 잘해야 하고 다리도 튼실해야 한다. 퇴근 후에도 사라진 아이를 찾으러 동네 일대를 돌아야 할 때도, 가정방문으로 학생 집을 찾아가야 할 일도 많으니까...



지금도 가끔 야광 형광펜을 보면 그날의 처참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난다. 찬란했던 바로벳의 운동화와 따라잡느라 열심히 뛰어 열 개의 발가락이 훤하게 삐죽 튀어나왔던 초라한 나의 슬리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그 바로벳는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중요한 삶의 숙제들을 야광 펜으로 아로새기며 야광 운동화만큼 힘 있고 찬란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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