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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부터 Apr 30. 2025

나의 보스토토 찾아가는 삶

정세랑, 『보스토토으로부터』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읽고 나면 마음속에 오래 남는 책이 있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내게 그런 책이다. 읽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문득문득 소설 속 장면들이 마음 한구석에서 반짝였다.




정세랑 작가의 할머니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바꿔 만들었다는 이름 심보스토토. 그 이름을 따라가며 만난 삶은 거칠고도 눈부셨다. 고향땅을 떠나 하와이로, 하와이에서 독일로, 다시 한국으로. 심보스토토이 삶의 자리를 옮긴 이유는 대부분 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그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움직인 것은 보스토토 자신이었다.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부서질 것 같아도, 시선은 멈추지 않았다. 마티아스라는 함정에 빠졌을 때도, 팔에 유화 나이프가 꽂히는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때로는 자신의 보스토토 숨기며 생존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녀는 주저앉지 않았다.


자신의 보스토토 찾은 뒤, 시선은 더 이상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온 유럽 사람들이 마녀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한국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갔다. 그 결과 시선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여성이라는, 가족이라는 가지를 따라 뻗어나갔다.보스토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경이로운 여성 그 자체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나는 보스토토처럼 살 수 있을까? 대답은 금방 나왔다. 모두가 보스토토처럼 살 수는 없다고.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 시선의 첫째 사위 태호에게도 마음이 갔다. (소설을 다 읽은 작가님들 중에서 태호가 누구였지? 하는 분도 있었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다.) 하여간 개성들이 넘쳐나고, 말의 밀도가 높은 그 집안에서, 태호는 조용히 제 몫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뭔지 알 수 없는 집안으로 장가를 왔지요."

태호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다들 바쁘게 제 보스토토 드러낼 때, 다음날 아침 먹을 빵을 사고, 냉장고를 채우고,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 소란스러운 아내 쪽 가족들이 사랑스럽기도, 조금 피곤하기도 했던 그. 태호는 누구보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가족 속에 자리를 잡았다.


크게 보스토토 내지 않는 사람. 그러나 태호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내 보스토토 필요할 때 꺼내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하고 다듬어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장모님의 제사상에 올릴 가장 맛있는 빵을 가져가기 위해 땀이 나도록 자전거 연습을 한 태호.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자신만의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웃으며 내보이는 태호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모두가 심시선처럼 눈부시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거창한 도전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자신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며 이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심시선을 단순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겨놓지 않은 것이다. 『시선으로부터』는 각 장의 시작마다 심시선이 생전에 남긴 글이나 인터뷰를 배치했다. 그녀를 가족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규정하지 않고, 심시선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었다.

그녀가 남긴 보스토토는 소설 전체를 이끈다.다른 사람을 추억하는 일은 때때로 그 사람을 지워버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설명하고, 해석하고, 덧칠하다 보면, 정작 그 사람의 생생한 보스토토는 사라지기도 한다.하지만 『보스토토으로부터』는 다르다. 심시선이라는 사람을 추모하면서도, 그녀의 보스토토 배제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녀는 자기 언어로 세상과 대화하고 있다.


시끌벅적한 제사 준비도 결국은 심시선 보스토토의 일부였다. 가장 좋은 팬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커피를 고르기 위해, 무지개를 찾기 위해, 가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 모든 작은 움직임이 모여, 심보스토토이라는 사람의 자취를 이어가고 있었다. 심시선의 보스토토는 가족들에게 뻗어나갔고, 그 가지들은 저마다 다른 하늘 아래에서 자라났다. 그 누구도 심보스토토이 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심보스토토을 잊지 않았다.


보스토토으로부터』는 조용히 말해준다. 삶을 살아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고. 크게 외치는 삶도, 조용히 움직이는 삶도, 모두 괜찮다고. 다만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보스토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만의 보스토토 품고 살아가는 일이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보스토토 내야 했던 어떤 순간에 뒤로 숨은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갈등이 두렵기도 했고, 말하는 나보다 침묵하는 내가 더 익숙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조용하지만 멈추지 않고, 내 보스토토 잃지 않는 사람으로. 그리고 언젠가는, 조심스럽게 키워온 나의 보스토토가 나의 사람들에게도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작고 흔들리는 보스토토일지라도, 내 삶의 말들을 내가 스스로 품고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품어온 말들, 내가 걸어온 움직임들이 누군가의 삶을 따뜻하게 건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이 내 이야기를 대신 써버리기 전에, 스스로 내 언어로 내 삶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보스토토조심스럽게 뻗어나가는 빛, 나의 보스토토도 그렇게 닿기를. (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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