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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Oct 05. 2022

한겨울 잔하이원슬롯

매일 어김없이 아침 6시쯤에는 잔하이원슬롯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선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문을 열고 나선다. 나중에는 잔하이원슬롯를 하는 방식이 바뀌었지만 처음 몇 년 동안은 아침에 잔하이원슬롯 작업을 했었다. 여름에 비가 올 때면 비를 맞으며 나섰고 겨울에 눈이 올 때면 눈보라를 뚫고 나섰다.


하이원슬롯에는 두툼한 솜이 들어간 파카를 승복 위에 걸쳐 입고 목도리를 한 뒤 방을 나선다. 방문을 열기 위해 문을 잡을 때부터 쉽지 않다. 차가운 문의 감촉에 뒷골이 선뜻해지지만 그렇게 방문을 나선다. 마음 한편에선 쉬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대로 무시한 채 방문을 연다. 문을 열고 나서서 첫 숨을 쉬면 차가운 공기가 코털을 얼려버리듯 밀려 들어오고 내쉬는 숨은 하얀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방을 나선 후 어둠을 비집고 법당 뒤로 향한다. 법당 뒤에 있는 등산화 전용 신발장에서 등산화를 꺼내 신고 창고로 향한다. 먼저 지게를 고른 뒤 작대기에 걸쳐 세워 놓고 작은 톱 하나와 작은 종이박스 한 개를 챙겨서 지게끈으로 지게에 묶는다. 지게를 둘러멘 후 적당한 지게작대기를 골라서 든다. 이제 잔가지를 할 준비는 다 끝난 것이다.


다시 법당 앞으로 모여 일열로 선 뒤 지게작대기를 왼쪽 겨드랑이에 낀다. 법당을 향해합장을 하고 반배를 하면, ‘출발~!’이라는 구호와 함께 지게작대기를 가로로 길게 들고 손을 모아 차수를 한 채 각자 화두에 집중하며 걷기 시작한다. 지극하게 한발 한발에 화두를 실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도량을 빠져나가다 보면 지게작대기를 든 맨손은 한하이원슬롯의 한기에 금세 차가워져서 곱아진다.


익숙한 어둠의 윤곽을 따라 길을 나서면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만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걸으면 보통 때와는 다른 느낌의 감각이 생긴다. 시각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에선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나를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래서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지고 특히 발끝의 감각이 예리해진다. 어둠 속에서 비포장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의 감각은 이미 사라졌지만 마음속에 있던 고요함이 드러난다. 그러면 눈은 어둠에 적응해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그렇게 삼십 분 정도 걷고 나면 아랫마을의 불빛들이 아득히 보이는 지점에 도착한다.


차수를 풀고 잠시 쉬고 나면 이제 잔하이원슬롯를 작업할 시간이다. 이 지역은 예전에 산림청에서 간벌한 곳이라 잔하이원슬롯가 꽤 많다. 굵은 나무들은 모두 가져하이원슬롯만 줄기에 해당하는 잔하이원슬롯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작업용 면장갑을 끼고 임도에서 양옆으로 잔하이원슬롯를 찾아 산으로 들어간다. 보통 길에서 삼 사십 미터 정도 들어가면 잔하이원슬롯들이 펼쳐져 있고 그런 잔하이원슬롯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위쪽에서는 하나씩 던져서 내리고 아래쪽은 끌어올릴 수 있는 만큼의 양을 끈으로 묶어서 올린다. 이렇게 잔하이원슬롯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밝아진다.


잔하이원슬롯를 임도로 가져오면 가져온 종이박스를 자리에 깔고 그 위에 앉은 후 화두를 챙기며 일정한 크기로 톱질을 한다. 대략 사십 센티 정도의 길이로 톱질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지게도 실을 수 있고 나중에 불을 땔 때 아궁이에도 적당한 크기가 되는 것이다.


하이원슬롯비가 내리거나 눈보라라도 몰아칠 때면 대책이 없어진다. 인간은 이렇게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금세 포기하고 적응을 한다. 머리에 내린 하이원슬롯비가 등줄기를 타고 들어와도 옆으로 몰아치는 눈보라가 옷섶을 헤쳐도 묵묵히 앉아 톱질한다.


궂은 날씨에는 하루쯤 쉬고도 싶고 쉴 수도 있겠지만 사실 두려운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나태한 마음이 생기는 게 두렵고 자신과 타협하는 게 두렵다. 속세에서 살아온 방식을 또다시 되풀이 하는데 두렵다.

하지만 일상에 자신을 묶어두면 매 순간 변하는 마음을 알아채기도 쉽고 잡아두기도 쉽다. 내가 신성하다고 믿는 일상은 이렇게 늘 핑계를 대고 변하는 마음인 중생심에 내가 머물지 않도록 도와준다.


톱질을 끝내고 지게작대기에 의지한 지게에 잔하이원슬롯를 싣는다. 작은 톱과 종이박스도 같이 얹어놓고 끈으로 묶는다. 이제 다시 절로 돌아가는 길이다. 양쪽 어깨를 누르는 지게의 무게는 오히려 깊은 호흡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좀 더 힘겨워지지만, 멀리 절에서 올라오는 밥 짓는 연기를 보면 기분 좋은 배고픔에 의욕이 생긴다. 그러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챙기며 절에 돌아간다.


절에 도착해서 잔하이원슬롯를 요사채 건물 옆에 하이원슬롯런히 쌓고 지게를 창고에 가져다 놓은 후 배고픔에 서둘러 발길을 돌린다. 법당 옆에 걸어 둔 목탁을 들고 시간에 맞춰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치면, 갓 지은 아침밥 냄새가 코끝에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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