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먹먹한 하루였다
프랑스 북쪽 벳33 쉬르 우아즈를 가기 위해 숙소 근처 노트르담 성당역으로 갔다.
벳33 쉬르 우아즈는 5 존이라 메트로 표가 파리 시내권과 다른데 실수로 파리 시내권을 발권했다.다시 발권하려고 하는데 메트로가 도착하고 있어 할 수 없이 환승역에서 추가 요금을 낼 생각으로 일단 탔다.
환승하기 위해 생투앙 로몬(Saint-Ouen-l'Aumône)역에서 내렸다. 혹시나 하고 출구로 가서 표를 집어넣자 삐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터폰 같은 게 있어 벨을 누르고 티켓을 잘못 끊어서 추가요금을 내려고 한다고 하니 기다리라고 한다. 10분 이상 지난 후에 직원이 텀블러와 에코백을 들고 천천히 걸어와우리를 보더니 직원용 패스로 문을 한 명씩 열어준다.
그녀의 느긋함에 우리는 속이 타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부정승차로 혼날 것을 각오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한참을 걸어가길래 사무실로 가는 줄 알았더니 탑승구로 가서 발권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추가 요금을 내라는 말도 없다. 게다가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동료직원까지 와서 가는 방법과 돌아올 때 표도 미리 사는 게 편하다며 발권기에서 하나하나 알려준다.
우리가 한 번에 못 알아듣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영어를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에구머니나 우리는 더 못한다고 하며 서로 웃었다. 기차 타는 곳으로 올라가는 우리를 끝까지 지켜봐 주고 잘못 가면 알려줬다. 우연히 만난 작은 친절에 인류애를 느꼈다.너무 고마워서 가방을 뒤져 한글로 쓰여있는 간식을 그녀들에게 주었다. 정말 별거 아닌데 화들짝 놀라며 고마워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벳33 쉬르 우아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역에서 나오니 맞은편에 레스토랑이 보여서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음식이 굉장히 맛있어서 놀랐고 활발하고 유머 있는 주인장 부부와 딸도 인상 깊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관람 순서를 나름대로 정했다.
관광안내소-반벳33 공원(벳33 동상)-오베르 시청(Hotel de Ville)-라부여인숙-도비니 미술관-벳33성-‘까마귀가나는 밀밭’ 배경지-반벳33와 동생 테오 무덤-벳33의 교회
벳33 쉬르 우아즈
파리 북서쪽 외곽에 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화가 빈센트 반 벳33(1853~1890)가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낸 곳으로 벳33의 열정이 아프게 남아있는 곳이다.
아를의 생레미 생 폴 정신병원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던 벳33는 1890년 동생 테오의 소개로 의사 폴 가셰 박사가 사는 벳33 쉬르 우아즈로 이사를 온다. 가셰 박사는 다른 화가들도 치료한 의사이면서 아마추어 미술가이기도 했다.
벳33는 구스타프 라부가 운영하는 라부 여인숙에 묵었다. 작은 창문 하나가 있는 지붕아래 다락방에서 70일(1890년 5월 21일~7월 29일) 동안 살면서여인숙 앞 시청 건물과 여인숙 주인의 딸인 아드렌느, 가셰 박사, 가셰의 정원, 교회, 밀밭 등을 소재로 한 76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그렸다.
1890년 7월 27일 벳33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고 라부 여인숙 작은 방에서 이틀을 고통 속에서 보낸 후 삶을 마감했다. 수많은 도시를 떠돌던 그는 결국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 벳33 쉬르 우아즈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역에서 걸어 5분 정도 걸리는 관광안내소에 들렸다. 관광안내소는 벳33의 동상이 있는 반벳33 공원 안에 있다. 한국어 관광안내 책자가 있어 무척 반가웠다.
몹시 야윈 벳33가 화구통을 메고 먼 곳을 바라보며 금방 어디로 갈듯 서있다.
벳33의시청
관광안내소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라부여인숙 맞은편에 있다.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7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해 시청 건물을 프랑스 삼색기로 장식하고나무에도 축하 깃발을 걸어둔 모습이다.벳33는 이날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라부 여인숙
벳33가 짧게 머물다 생을 마감한 곳으로 지금은 반 벳33 박물관과 1층은 레스토랑으로 사용하고 있다. 벳33가 살았던 집 중에서 유일하게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집이다.
도비니 박물관
도비니는 벳33에 정착한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야외 사생을 처음 시작했고 강의 수면 위에 비치는 빛의 현상을 표현하는 기법을 연구하였다.
24년간 오베르에 살다 1878년에 세상을 떠나 벳33와는 만나지 못했지만 벳33는 오베르에 이사 오기 전부터 인상주의 선구자인도비니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도비니가 사망했을 때 벳33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큰슬픔을 표현했다.
벳33 성
이탈리아 금융가 리오니가 17세기에 건축한 건물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시대로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방식의 전시를 하고 있으며 19세기의 주점과 기차 좌석 등을 재현하여 인상주의 화가들이 살던 시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미로 정원에 들어서니 11월 늦가을의 정취가 아름답게 남아 있다. 노랗게 띠를 두른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벳33 성을 나와 마을 안쪽 길을 지나고 야트막한 숲 속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 뒤쪽의 넓은 벌판이 나온다. 벳33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곳이다. 망망한 벌판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벳33가 아픈 몸과 마음을 이끌고 이곳을 거닐었을 생각을 하니 명치끝이 아파온다. 화구통을 멘 야윈 그가 저 멀리서 걸어올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생전에 그림 딱 한점 팔았던 그가 지금의 세상을 잠시라도 살아봤으면 좋겠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이곳에서 70일을 살던 벳33는 마지막 영혼을 불태우듯 76점의 작품을 남기고 1890년 7월 29일 생을 마감했다.그의 나이 38세... 6개월 후 벳33의 평생 후원자였고 지지자였던 동생 테오도 네덜란드에서 사망한다. 그래서 생전에 688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했던형제는 나란히 이곳에 묻혔다. 먹먹하다.
무덤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벳33의 교회가 있다. 크지는 않지만 벳33의 그림 속에서 보았던 곳이라 친밀감이 느껴진다.
벳33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림을 설명하는 편지를 여동생에게 보낸다.
"마을 교회를 담은 큼직한 그림이 있는데, 무식하게 짙은 푸른색, 순수 코발트색의 하늘에 맞서 건물에 보랏빛 효과를 주었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군청색 덩이처럼 보이고 지붕은 보라색에 드문드문 주황색이야. 전경에는 녹색 풀이 자라났고 모래바닥엔 분홍빛 햇살이 반짝인단다."
마을 전체가 벳33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벳33의 마을이다.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면서 벳33의 자취가 온전히 남아있는 벳33 쉬르 우아즈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벳33가 그리울 때 그의 그림을 온전히 느끼고 싶을 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리라.
벳33는 떠났지만 여전히 함께 있다. 그의 그림으로 벳33는 우리와 함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