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브런치북은 매주 일요일 지담 작가와 함께 하는 인문학 라이브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깨달은 것, 배운 것, 생각한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나는 자주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정신을 어디 다른데 두고 와서 정작 지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신이 없어 커피를 내리는데 커피 포트 주전자에 물을 안 채워넣고, 설거지를 하려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어놓고 세제 캡슐까지 넣어놓고는 깜빡하고 작동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내 정신은 어디로 간걸까?
커피를 내리는데 필요한 정신, 설거지를 하는데 필요한 정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딘가 다른 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내가 요즘 빠져있는 곳, 바로 글쓰기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탓일게다.
어쩌다가, 최근 내 최대 관심사가 글쓰기가 되어버렸고 내가 가장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은 '엄빠의 유산'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는 브런치 작가들이 되어버렸다. 6개월 전부터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하던 나는, 최근들어 블로그에 시큰둥해졌고 그 에너지를 브런치에 쏟고 있다. 물론 아직 최대 화력은 아니고 서서히 예열중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동안 다소 소극적이었던 브런치에 큰 애정을 쏟고 있다. 모두 엄빠의 유산 팀 덕분이다.
일주일에 3편 브런치북을 연재하고 있지만, 한편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거의 하루이틀을 글 한편에 투자하고있다. 글의 주제를 대략 생각했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날카롭게 뽑고 살을 붙이고, 또 직접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아있으면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려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커피를 내리면서도 글 생각 뿐이다.
또한 요즘 문득문득 글로 쓰고 싶은 '한 줄의 문장'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얼른 브런치북을 재정비하고 브런치 성장 매거진도 만들면서 스쳐지나가는 한줄의 영감을 놓치지 않고 글로 꽃피우게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글쓰기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 커피 내리고 설거지하는 데 어버버하고 있는 나를 타박하지 말고 그냥 귀엽다고 해주기로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또 퍼스널 브랜딩이 뭔지 배우기 시작하면서 줄곧 나를 고민에 빠뜨렸던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텐데, 바로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남들이 원하는 글 중 어느 것을 써야할까?" 케이슬롯.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냥 나 혼자 쓰고 읽을거면 굳이 이런 플랫폼에 올리지 않고 집에 있는 일기장이나 다이어리 어플에 쓰면 그만이다. 실제로 케이슬롯 블로그에 글을 쓰기 전 페이스북에 '비공개'로 일기를 썼다. 어차피 나만 볼테니 그곳에 쓰는 글은 정말 의식의 흐름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아무 여과없이 줄줄 써내려가는 글들이었다. 주로 내가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때, 내 심정을 토하듯 쓰는 글들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렇게 토해내듯 내 마음을 쏟아내고 나면 마치 목에 걸려있던 복숭아씨가 하임리히 응급처치법으로 톡하고 시원하게 빠져나와 막혔던 숨통이 트이듯,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내 마음이 정갈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케이슬롯 글쓰기가 주는 그러한 카타르시스적인 쾌감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다.
그런데 나만 읽는 일기가 아니라 남들도 읽을거라 기대하고 쓰는 글은 일기와 달라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내 안에 있었다. 실제로 퍼스널 브랜딩과 관련된 글쓰기 강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은 '나를 위한 글' 말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라는 것케이슬롯. 이 내용은 내가 글을 쓰려고 할때마다 늘 내 뒷덜미를 잡고 양손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 쉽사리 손가락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늘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 글은 너무 일기 같은 글 아닌가? 케이슬롯 지금 쓰려는 이 글은 나만 관심있고 나한테만 도움이 되는 글 아닌가? 남들에게도 이 글이 도움이 될까? 내 글이 과연 타인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남'을 의식할수록 더욱더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차피 글쓰기라는 행위가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들이 좋아할 것 같은' 주제를 써야하나 고민할 이유가 하등 없다. 고민해봤자 잘 쓸 수도 없을테고, 그럴 시간에 나의 세계를 어떻게하면 매력적으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타인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일 것케이슬롯.
나에게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스스로를 폄하하기보다, 케이슬롯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고 스스로를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케이슬롯 나를 아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아껴주지 않는다.
나의 가치는 케이슬롯 만들어가면 된다.
내 글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케이슬롯 내 글에 얼마나 진정성과 애정을 담았느냐가 결정한다.
불교국가인 티벳에는 'create'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없다고 한다. 대신 'natural'과 같은 개념이 창조적 활동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보통 creation(창조)는 서구문화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반해, 티벳 불교에서는 자연스러운 과정 속에서 발생하고 전개되는 흐름이라고 보는 문화적 특성을 담고 있는 것케이슬롯.
이 말을 글쓰기에 적용하면, 나에게 없는 것(무)에서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담는 것이 바로 창조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나답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케이슬롯.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꿈을 추구하고, 욕망을 추구하고, 더 나은 삶과 변화를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존재케이슬롯. 인간의 추구하는 본성은 자연의 섭리이고, 따라서 꿈을 꾸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일인 것케이슬롯.
그 꿈이라는 것은 나만이 가진 본성을 찾아서 나만이 이룰 수 있는, 마치 우주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어떤 가치있는 일케이슬롯. 내가 아니면 안되는, 반드시 나여야만 하기에 그것을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갖가지 고난과 실패를 통해 더 큰 사람이 되도록 독려한다.
그러므로 케이슬롯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삶이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우주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게끔 그저 허용하면 된다. 내가 우주이고 우주가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삶에서 일어케이슬롯 크고작은 일들에 대한 마음의 저항을 버리고 우주의 일부로서 나를 내맡기게 될 수 있다.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으니 케이슬롯 그저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글은 글이 가는 길이 있으니 케이슬롯 내가 쓴 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면 된다.
우주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꿈과 내가 그 꿈에 적합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아름다운 합일의 순간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깨닫게 될 것케이슬롯.
그러니 늘 기억해야겠다.
케이슬롯 존재 자체로 빛케이슬롯 아름다운 별이자 우주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다는 사실을 말케이슬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