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렇게 프리미어토토의 중심이 되었다.
달이가 태어난 해 첫여름 프리미어토토가 밤낮없이 자꾸만 칭얼거렸다. 초보 엄마는 프리미어토토가 왜 그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차만 타면 조용히 잠을 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흔들리는 차라서 좋은가 했는데 멈춰 서면 또 '애~'하고 깨야하는데 깨지도 않고 잘도 자는 거다. 바로 에어컨이었다.
프리미어토토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선풍기만 있었는데 아기는 습하고 더운 게 싫었던 거다.
정말 아끼던 시절인데 남편은 당장 하이마트로 달려가 에어컨을 장만했다. 에어컨이 설치되던 날부터 프리미어토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잘도 잤고 에어컨을 끄기라고 하면 곧바로 '애~'하고 깨곤 했다. 우린 그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동물원의 바오 가족들 보듯 프리미어토토를 가운데 두고 둘이서 이리저리 관찰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13개월쯤 어느 날 반바지 입고 앉아있는 아빠의 다리를 유심히 쳐다보길래 프리미어토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달아~ 이게 뭐야?"
"아빠 머리까락" 프리미어토토의 눈에는 아빠의 풍성한 다리털이 머리카락으로 보였나 보다. 아니면 털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수도 있다.
런닝 셔츠만 입고 있는 아빠의 겨드랑이를 가리키며
"이건 뭐야?"
"아빠 머리까락"
"그럼 아빠 머리카락은 어디에 있을까?"
했더니 머리, 겨드랑이 그리고 다리를 손가락으로 집는다.
이 모습이 신기하고 귀여워서 프리미어토토가 깔깔깔웃으니 어린 달이는 프리미어토토가 왜 웃는지도 모르며 자기도따라서 깔깔깔 웃는다.
프리미어토토의 눈에 모든 털은 머리카락으로 보였구나.
우린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야기를 종종 한다. 이 프리미어토토가 정말 사람으로 커가고 있구나를 강하게 느낀 날이기도 하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살았던 프리미어토토 집의 놀이터는우레탄 바닥이 아닌 모래 바닥으로 개똥과 담배꽁초가곳곳에 있었고 미끄럼틀은 부서져 접근 금지 테이프가 둘러져 있고 시소는 타이어 받침대도 없어 멀쩡한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곳이었다.
동네 자체가 언덕이라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프리미어토토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유모차를 끌고 나가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웃들도대부분 어르신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우리 둘은 집순이가 되었고 집 또한 교대근무를 하는 남편이 잠을 자는 시간이 많았기에 프리미어토토와 둘이서 쉬쉬하며 조용히 놀아야 하는 날이 많았다.
둘이서 할 거라고는 동화책 읽기와 낱말 카드 찾기그리고소꿉 놀이었다. 그러다 손잡고 잠시 작은 아파트 단지를 걷는 건데 그 마저 오가는 차들로 여의치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때부터 난 그 아파트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맹모삼천지교라고 프리미어토토를 위해서라도 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가자고 남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도 남편의 직장과 가까운 그곳을 고집을 해서 신혼집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프리미어토토를 고려하지 못했다.
주변에 프리미어토토가 걸을만한 장소뿐만 아니라 문화센터도 없었다. 결정적인 건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없어서 20분 이상을 차량으로 다녀야 했다. 흔들림 없던 남편을 꼬시고 꼬셔서 억지로데리고 신도시 구경을 갔다.
그때 나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이 남자를 이번에 꼬시지 못하면 나와 달이는 계속 그 답답한 곳에 갇혀서 살아야만 했다. 이제는 언제든 밖으로 나가서 걷고 뛰고 또래 친구들도 만나고 싶은데 말이다.
신도시는 달랐다. 차가 다니지 않는 넓은 산책로에 도보 10분 미만 거리에 문화센터도 있고 아파트 바로 옆에 학교들이 다 있었다. 유모차 길도 잘 되어 있어서 남편이 자는 시간엔 프리미어토토도 밖으로 나갈 곳이 있었다.
신도시를 맛본 남편은 예상대로 바로 이사를 하자고 했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린이 도서관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그런 아쉬움이 있었는데 마침 집 앞에 동화책 대여점이 생겼다. 한 달에 회원비 3만 원을 내면 책 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볼 수도 있고 매일 전집 5원을 빌려갈 수도 있었다. 이건 프리미어토토 모녀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프리미어토토 사놓은 전집 3세트로 돌려가며 읽었는데 이제 달달 외울 수준이 되었던 차였다.
달이와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 한 술 뜨고서 출근하는 직장인 마냥 책 방으로 출근을 했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책 5권을 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뱃속에 둘째가 있어 몸이 무거워지면서 시작한 실내 놀이가 있었다.
난 좁은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달이에게 책 제목을 얘기하면 프리미어토토가 꽂혀져 있는 책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일종의 병원 놀이 같은 것이었다. 놀자는 프리미어토토와 배가 불러서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엄마가 완전히 눕지는 못하고 눕다시피 기대어 앉아서 입만 놀리고 프리미어토토는 고민하고 움직이는 놀이였다.
설마 프리미어토토가 책을 찾아올까 의심조차 없었다. 어떻게 그림도 안 보이는데 꽂혀 있는 책을 찾아오겠어. 그냥 책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길었음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찾아서 가져오는 거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고도 여러 번 했는데 귀신같이 정확하게 책을 가져왔다. 그 놀이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날까지 계속되었다.
몰랐다. 프리미어토토가 한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초보 엄마는 글씨를 알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한글을 가르친 적이 전혀 없어서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