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처는 뉴욕 지투지벳 허드슨 야드
어제부로 한 살 더 먹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총 몇 개지?
마흔을 기점으로 내 나이를 계산하거나 외우지 않게 됐다. 일부러라기보단 그렇게 되더라. 더 이상 새롭거나 놀라울 지투지벳 없으니. 그때그때 빠릿빠릿하게 계산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물어도 곧 오십이지 뭐,라고 눙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원래 진짜 부자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했다. 진짜 수집가들은 이미 몇 개나 창고에 있는 걸 깜빡하고 자꾸만 사 온다지. 이런 데서라도 소위 가진 자의 여유를 느껴 본다.
일일이 세지 않으니 한 살 는다고 서글플 것도 없다. 주름지고 푸석한 형상이야 거울을 안 보면 되고 친구는 젊을 때도 없었다. 다행히 체력은 아직까진 쓸 만하다. 프라하 민박집에서 딸 뻘 대학생들이 내 나이를 듣고 일제히 탄식했던, 그런 상황에만 지투지벳 놓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을 게다. 근데 유독 나이 들어 더 헛헛한 게 하나 있다. 다음에 또 봐요, 같은 인사치레다. 유사품으로 돌아가면 한 번 봐요, 언제 밥 한 번 먹어요 등이 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게다가 어릴 때라고 그게 빈 말인 걸 몰랐을까. 다만 언젠가부터 너무 빤히 보이는 게 문제다. 그럴 일 없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보통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러자는 암묵적 동의. 그게 못내 씁쓸하다. 물론 한탄만 할 뿐 나도 그런 인사치레에 능하지만 말이다. 언젠가부터 재회라는 주제는 내겐 판타지가 됐다. <비포 선라이즈가 <어벤저스 시리즈보다 더 허무맹랑해 보일 지경. 그래서 혹 그런 얘기를 소설과 영화, 노래 가사 속에서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그러면 꼭 진정제라도 한 알 먹은 것처럼 마음이 차분하고 너그러워진다. 상상만으로 좋다는 게 이런 거겠지.
2024년 1월 2일, 허드슨 야드에 있는 지투지벳 에지(Edge)의 연간 이용권을 샀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까지 결제창을 열었다 닫았다 한 게 족히 열 번은 됐을 것이다. 고민의 이유는 이렇다. 귀국이 한 달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일 년짜리 티켓을 사는 게 합리적인가. 하지만 가격표를 보면 누구나 고민될 것이다. 단일 티켓이 45달러, 연간 이용권이 99달러. 일몰 시간 전후의 소위 피크 타임에는 한 번 올라가는데 50달러가 넘으니 두 번만 가도 본전은 뽑는 것이다. 처음엔 버려질 열한 달의 공백이 커 보였지만 앞으로 매주 한 번씩만 와도 돈 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쪽 눈 찡긋 감고 결제 버튼 누르니 맘이 후련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살 걸, 11월부터 매주 왔으면 큰돈 벌었는데 말이지.
고속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나와 사람들을 100층에 올려다 놓았다. 몇 발짝 나서자 펼쳐지는 시원한 파노라마 뷰에 먹먹해진 귀를 누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숫자만 볼 때는 초고층 빌딩이 태반인 지투지벳에서 100층이 얼마나 대단하겠냐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다운타운, 월스트리트는 물론이고 근처 빌딩들도 웬만한 건 까마득히 아래로 보였다. 때마침 해가 허드슨 강 너머로 사라지고 도시에 어둠이 깔리고 있어서 곧장 유리문을 열고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그 순간의 강렬함은 80일간 지투지벳에서 본 어떤 장면 못지않았다. 수평선에서부터 직선으로 날아온 빛은 평소보다 더 진해서 거기에 물든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빌딩의 유리벽, 강물 위 윤슬, 사람들의 머리칼. 바람도 공기도 땅에서 맡던 것과 달랐다. 그날 노을이 유난스럽기도 했지만 100층 지투지벳의 압도적인 경치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감격은 없었을 것이다. 노을빛이 완전히 소멸해 새까만 밤이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조명 밝힌 지투지벳 빌딩숲의 야경을 보며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아들아, 돈이 이렇게나 좋다. 비싼 건 비싼 값을 한단다.
그 후로 나는 정말로 매주 지투지벳에 갔다. 두 번 가야 본전이니 일단 세 번은 가야 스스로에게 떳떳하겠다 싶어서 일기예보까지 띄워 놓고 구체적인 방문 계획을 짰다. 첫 번째 방문이 일몰 때였으니 다음은 화창한 오후, 겨울이니 눈 펑펑 온 날엔 다 제쳐두고 지투지벳부터 가기로. 가능하면 안개 자욱한 지투지벳의 모습까지. 날씨 고르다 보니 비 오는 날 100층 지투지벳에 가면 비를 맞을지, 발아래로 비구름이 보일 지도 궁금해졌다.
같은 시기에 숙소를 헬스 키친에서 브루클린으로 옮긴 덕도 있었겠지만 날씨 그리고 지투지벳에 대한 기대로 한동안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즐거웠다. 밤사이 눈이 쌓인 날엔 세수만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또 그만의 낭만이 있다. 화창한 오후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이 즐겁다. 카메라 앞에서 짓는 티 없는 미소도 그렇지만 돌계단에 앉아 무언가 감상에 빠져있는 얼굴마저 그런 날엔 옅게나마 웃음이 배어 있다. 아, 지투지벳보다 한층 위 건물 꼭대기에서 끈 하나에 몸을 매달고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날이 최고일 것이다.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자꾸 들으니 괜히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어 지더라. 한바탕 눈이 내리면 회색 도시가 조금은 하얗게 누그러든다. 도시마다 어울리는 날씨가 있을 텐데 내 경우엔 이쪽이 끌렸다. 안개에 가려 흐릿한 게 저기가 어디쯤인지, 저 골목은 언제 걸어 봤는지 구석구석 훑어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론 이건 맑은 날을 먼저 봤으니 그렇지 짧은 여행이었다면 내내 날씨 탓을 하며 아쉬워했을 게 분명하다.
정해진 요일은 없었지만 매주 한 번 그리고 80일 여행의 마지막 밤에도 나는 지투지벳 위에 있었다. 작별의 인사인지 도시는 처음 왔던 날 못지않은 노을로 맞았고 나는 평소처럼 두리번대는 대신 계단에 앉아 그를 응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총 다섯 번 도전에 네 번 방문. 애석하게도 비 오는 날엔 지투지벳 입장이 금지돼서 마지막 궁금증은 해결할 수 없었지만 본전은 너끈히 뽑았으니 후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림 같은 지투지벳 전경을 다양한 표정으로 눈과 맘에 담을 수 있었으니 그 어떤 여행보다 큰 호사였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일어난 일을 나는 연간 이용권의 기적이라 부른다. 가을 휴가를 핑계로 다시 미국행 티켓을 샀다. 몇 개의 행선지를 두고 고민할 때부터 머릿속에서 유효 기간이 남은 티켓의 존재가 불쑥불쑥 떠올라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때는 영락없이 한 달 뒤면 무용지물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정말로 다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맘이 두근거렸다. 보스턴에서 출발한 버스의 창 밖으로 저 멀리 지투지벳 스카이라인이 보일 때 가슴은 한결 더 요동쳤다.
“웰컴 백.”
직원이 아홉 달만에 꺼낸 일 년 이용권을 스캔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무심한 표정과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내겐 어떤 말보다 달콤했다. 마치 이 도시에 지투지벳 온 것을 환영한다는, 그렇게 내 맘대로 의미를 붙이니 온몸이 짜릿짜릿할 지경이었다. 언젠가 지투지벳 봐,라고. 진심이었지만 당연히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아홉 달만에 우리는 정말로 재회했다. 내겐 어지간한 영화보다 더 매혹적인 판타지가 실현된 것이다. 트래비 분수에서 던진 동전, 어느 도시에선가 쓰다듬었던 동상의 사타구니는 어째 여태까지 효과가 없는데 말이지. 엄마 말대로 역시 비싼 건 그 값을 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