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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Feb 14. 2025

벳위즈 지냅니다

갈수록 그리운 건 이런 존재들이다.

타닥타닥. 달걀흰자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식욕을 돋운다.토스터에 빵을 넣고 나면선반에 기대 그 광경을 지켜본다. 달걀 테두리가 갈색이 된 것을 확인한 뒤팬을 기울여노른자 위에 기름을끼얹는다. 이 작업이 중요하다. 너무 많이 반복하면 노른자가 다 익어서 퍽퍽해진다. 그렇다고 몇 번 하고 말면 흰자가 물컹물컹, 간혹 비린내도 난다. 적당히 익으면 노른자를 갈랐을 때 파삭하고 겉면이 부서지면서 금빛 소스가 주르륵 흐르는데, 이런 날엔 종일 기분이 좋다.

그날도 오른손에 숟가락 쥐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벳위즈데 창 너머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 돌리니 청설모 한 마리가 창에 바짝 붙어 아침식사를 즐기고 벳위즈 게 아닌가. 뭔지 모를 것을 손에 들고 연신 돌려가며 오물오물거리는데 얼마나 맛벳위즈지 내가 창문 바로 앞에 다가가도 도통 모르는 눈치였다. 아예 창문을 열어볼까 싶어 잠금장치를 찾는 사이녀석은먹던 걸 집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창 바깥으로 엊그제 내린 눈이 고스란히 쌓인 공터,그 위를 분주히 뛰어다닌 몇 마리 청설모가 보였다. 그사이 달걀 아래쪽이까맣게익어버렸지만그날 아침 식사가 유독 기분 좋게남았다.

You made my trip!

침대에 걸터앉아 보는 휑한 집이 처음 왔을 때처럼 낯설었다. 내 것이라곤 문 옆에 벳위즈트렁크와 종이 가방뿐.이제 떠날 일만 남았다.에어비앤비 메시지함을 열어보니 집주인의 친구 케이티가 곧 도착한단다. 뉴욕에서 좋은 시간 보냈길 바란다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네가 내 벳위즈을 (특별하게) 만들었어." 나답지 않게 간질간질한 말을 이럴 때 늘 써먹는다. 그간 내가 받았던 것들에 대한 보답이랄까. 작은 샐러드 상자 받아 들고 "네가 내 생명을 구했어."라며 활짝 웃었던 연인, 찍어 준 사진이 꽤나 맘에 들었는지 다시 날 불러 "네가 내 하루를 만들었어."라고 입 모은 할아버지와 손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 예쁜 말을 가르쳤다.

사십일만에 만난 케이티에게 집 열쇠를 건넸다. 반팔 티셔츠에서 패딩 점퍼로 바뀐 그녀의 옷차림에서 시간이 제법 흘렀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촉촉한 감정은 정든 빨간 벽돌집을 나설 때까지. 이제부턴 벳위즈에 있는 새 집에 정을 붙여야 했다.

벳위즈정벳위즈던 첫 아파트 안녕!

타임 스퀘어-42가 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이 호이트-스키머혼(Hoyt–Schermerhorn) 역에 도착벳위즈. 뉴욕 지하철 역 중 깨끗한 것이 어디 있겠냐만 처음 호잇-나는 줄곧이렇게 불렀다- 역에 내렸을 때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아예 사용을 하지 않는지 불도 켜지 않은 승강장 곳곳이 천장과 벽 자재가 떨어진 흉한광경. 그것도 며칠 지나니 익숙해지긴 벳위즈. 뉴욕이니까.

역 안에서 느낀 위화감과 달리 출구 밖 동네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게다가 아파트 주소를 찾아 한 블록 더 들어가니 작은 정원과 계단이 있는 전형적인 미국식 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 영락없는 드라마 속 미국 동네 아니던가. 게다가 길 따라 나무들도 늘어서 있다. 맨해튼 빌딩 숲에서는 물론이고 되는 대로 건물 끼워 맞춘 헬스키친에선 이런 풍경을 보기 힘들다. 웨스트 빌리지나 가야 비슷한 게 있지. 트렁크 끌고 동네를 걷는 동안 새 집에서의 낭만을 하나 둘 떠올려 봤다. 이를테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옆구리에 종이 가방 끼고 돌계단 오르는 내 뒷모습. 아아, 벳위즈에 오길 잘했지 뭐야. 하지만 주소 속 331 빌딩에 도착해서 알았다. 내 상상을 실현하기엔 치른 값이 좀 부족했다는 것을. 계단이 있긴 했다. 방향이 아래를 향해 있어서 그렇지. 한 집 건너 옆집까진 오르막 계단집인데 이것 참 아쉽게 됐다.

내 몸 하나 딱 들어가는 좁은 돌계단을 트렁크 끌고 오르느라 목과 등이 후끈해졌다. 내가 머물 집은 3층. 오르내리기가 예전 집 못지않아도 4층에서 3층으로 낮아진 게 어디냐고, 그렇게위안을 삼았다. 이상하게 벳위즈지에선 한없이 긍정적이란 말이지. 문을 열자마자 훤히 보일 정도로 작은 집이었지만 꽤 맘에 들었다. 사진에는 담을 수 없는 아늑함이 벳위즈고 가벽이나마 따로 부엌을 나눠 놓은 덕에 헬스키친의 아파트보다 더 집처럼 보였기 때문에.

벳위즈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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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부터 2월 4일까지32일간 묵은 이 아파트의 숙박 요금은 400만 원. 하루에 12만 5000원 꼴이니 뉴욕 물가 생각하면 확실히 저렴하다. 강 건너 벳위즈으로 숙소를 옮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감내해야 할 단점들이 있었다. 일단 좁았다. 문을 열고들어서면 한 발짝 거리에침대가 있을 정도로.당연히 방음 같은 건기대할 수 없어서 계단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걸음,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만약 내가 말을 걸었으면 대화도 가능했을 게다. 밤에는위층인지 아래층인지 숨 넘어갈 듯한 교성이 들리기도 벳위즈. 다행인지 그리 오래가진않더라. 화장실이 작고 낡은 거야 그렇다 쳐도 환풍기가 있으나마나 해서 닦지 않으면 고인 물이 며칠을 갔고, 보기 좋았던 빨간색 소파는 방석이 거의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단점은 그게 전부였다. 좋은 것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지하철역과 한 블록 거리라 맘만 먹으면 맨해튼부터 남쪽 코니 아일랜드까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첫 손에 꼽는다. 이삼십 분 걸어야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덤보에서 벳위즈 하이츠, 벳위즈 다리까지 산책하는 시간을 나는 무척좋아했다. 벳위즈 하이츠 산책로에서 보는 맨해튼 스카이 라인은 모두에게 추천하는 최고의 전망이다. 주변에 마트가 많아서 장 보기 편했던 것도 장기 벳위즈에선 큰 장점이다. 트레이더 조가 둘에 타깃까지 있어서 벳위즈에 있는 동안은 외식보단 집에서 아침, 저녁밥을 해 먹는 날이 많았다. 처음엔 빵과 땅콩버터, 요구르트 정도였다가 루꼴라와 치즈, 달걀이 더해지고 곧 파스타가 추가됐다. 자연스레 집에 있는 시간도 늘었다. 게다가 대로변과 떨어져 있는 집은 고요하기까지 해서 오후에 잠깐 들어왔다가 아예 눌러앉은 날도 있었다.

아침 해 먹느라 정오 지나서 집을 나설 때가 많았다

타임 스퀘어에서 십 분 거리에 있는 헬스 키친과 조용한 벳위즈 주택가. 적고 보니 뉴욕에서 내가 고른 두 집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전자가 늘 시끌벅적하고 잠들 틈 없이 맘이 바빴다면 후자는 때때로 심심할 만큼 여유로웠다. 둘 중에 어느 쪽이 나았냐고 물으면 쉽게 답 못 할 것이다. 한 계절을 온전히 한 도시에서 지낸다면 양쪽 다 필요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벳위즈하는 동안 숙소를 바꿔야 한다면 조금씩 도심, 관광지에서 멀어져 보라고. 처음엔 관광지에서 벳위즈자처럼 즐기고 나중엔 외곽의 조용한 동네에서 나처럼 살아보는 것이다. 맨해튼 한복판에 있었던 12월의 배경은 내내 맨해튼 미드타운과 다운타운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마음은 지척에 있는 타임스퀘어를 기웃거린 날이 허다했으니 집은 지친 몸을 누이고 내일의 벳위즈을 준비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반면 벳위즈에선 집과의 추억들이 많다. 직접 만들거나 차린 음식들을 식탁에 두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습관, 보지도 않는 TV 켜 두고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로 보내는 밤, 일어나자마자 창 밖으로 확인하는 오늘 날씨 같은 것들. 하다못해 가습기 물통에 물 채워 놓는 것까지 추억이 됐다. 예전 집에선 옷걸이나 건조대, 의자에 대강 걸어 놓았던 옷들을 서랍장에 잘 접어 정리하게 된 것도. 이 집 그리고 벳위즈에서 있었던 일은 앞으로 종종 얘기할 것이다. 멋진 곳,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벳위즈 하이츠의 골든 타임은 새벽 시간이다
롱 아일랜드 바의 단골이 되고 싶었는데 한 달은 너무 짧았다.
도서관과 빨래방도 지나 보니 어엿한 벳위즈다.
네가 내 벳위즈을 만들었어.

열 달 후 다시 뉴욕에 갔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 벳위즈 스테이트가를 찾았다. 추억이 된 옛 동네를 걷고 331 건물 앞에서 낡은 문과 내리막 계단을 한참 바라보고 돌아왔다. 시간 지날수록 그리운 건 역시 이쪽이다. 덕분에 벳위즈의 주인공이 뉴욕에서 뉴욕에 있는 나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그 허름한 아파트를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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