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환경에서 성장하느라 고생했어, 정말 대견해, 이젠 편안해지자.
콩밥의 콩처럼 글 속에 드문드문 드러나긴 했지만, 썩 건강한 환경은 아니었기에 어릴 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담담하게 털어놓을 정도가 됐지만, 처음 우울증이 발병한 21살에는 폭력과 공포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래서 우울증 발병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울증을 설명하기 위해 글 위에 오랜 나의 고통과 상처를 한 번쯤 고백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래서 정신과 첫 방문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펑펑 울었나 보다. 의사는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지, 함께 살고 있는지 등을 물으며 상담을 시작인터넷 바카라. 나는 아빠를 아주 명확한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인터넷 바카라. 악마. 중고등학교 때 내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인터넷 바카라를 마주치면 어깨를 움츠리고 서둘러 집에 돌아갔다. 막내딸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는데도 웃음기 하나 없이 대꾸 한마디 없이 노려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경험 말고도 친구들은 아빠의 존재를 평소 자주 확인인터넷 바카라. 내 몸에는 항상 멍이 가득인터넷 바카라. 머리에는 피딱지가 앉아있었다. 집을 청소하기 위해 있었던 자루가 원목으로 된 빗자루는 구타 도구였다. 빗자루를 갖다 버리면 모든 게 사라질까 생각도 했지만,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엄마보다 열 살이 많았던 아빠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반대로 열 살 인터넷 바카라 엄마는 아빠보다 모든 면에서 현명했고, 장사수완이 좋았다.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가정이 굴러가고 우리 딸 셋이 먹고 자랐다. 그 와중에도 아빠는 기가 막힐 정도로돈을 벌지 못했고, 인터넷 바카라가 벌어온 돈으로 차린 공장에서는 수시로 부도수표를 받아왔다. 그 부도수표를 들고 한 푼이라도 수금하러 다닌 사람도 인터넷 바카라였다.
인터넷 바카라 아내를 향한 열등감은 의처증으로 번졌다. 아빠는 엄마에게 일을 가지 말고 자신이 주는 생활비로만 살아가라고 명했다. 당시 아빠가 한 달에 준 돈은 20만 원 남짓이었는데, 당시 졸업앨범 비용이 5만 원이었던 걸 떠올리면 얼마나 턱없는 생활비였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든 벌어야겠다는 엄마와 아빠는 숱하게 싸웠고 아빠는 폭력을 썼다. 처음 아빠의 폭력은 엄마에게만 향했는데,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나와 언니들에게도 거세게 불어닥쳤다.
나는 아빠를 보고 웃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을 나간 엄마 대신 저녁 밥상을 차렸는데 밥을 평소보다 많이 담았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왔는데 인사를 작게 했다는 이유 등으로 구타당했다. 정말 기절할 만큼 맞았다. 크고 두꺼운 손으로 따귀를 수십 대 때리고 원목 빗자루로 온몸을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둘째 언니는 아빠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졌다. 아빠는 외출하고 온 언니의 옷차림이 너무 어른스럽다며 마당 수돗가에 언니를 엎어 놓고 발로 밟은 적도 있었다. 아빠가 망치를 들고 엄마를 때리겠다고 쫓아다닐 때 나는 못 참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집으로 와 “집안의 일은 집 안에서 해결하시라.”라고 말한 뒤 돌아갔다. 그날 역시 나는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다신 허튼짓 못 하게 한다며 아빠는 전화선을 잘랐다. 한동안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었다.
아빠의 폭력은 고등학교 2학년을 맞이하고도 계속됐는데, 그때까지 친척들은 대강 눈치는 챘지만 이처럼 심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겨우 외가에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인터넷 바카라. 엄마는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삼촌 소유의 집에 전세를 계약인터넷 바카라. 공장에 일이 없어도 늘 아침 8시면 재깍 출근하는 아빠의 생활방식을 고려해 엄마와 우리 딸 셋은 탈출을 계획인터넷 바카라.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 다시 되돌아와 짐을 싸 이사를 가는 계획이었다. 나는 아직 학생이라 이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탈출하던 날 아침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여름이라 하복을 입었고 책가방엔 당장 입을 속옷과 학용품, 양말 등을 챙겼다. 언니들은 출근하듯 일찍 집을 나섰지만 사실 휴가를 낸 상태였다. 인터넷 바카라가 출근한 걸 확인한 뒤 언니들이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이삿짐을 꾸리고, 낮에 이삿짐 차에 실었다. 짐을 챙겨 엄마와 언니들은 전셋집으로 도망을 갔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인터넷 바카라가 미행하면 전셋집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터라 반년 정도 외가에서 지냈다. 그러니 탈출한 날 속옷과 양말을 챙긴 나는 학교를 마치고 외가로 가는 버스에 탔다.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버스에서 많이 울었다.
위에 적은 일은 그 집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약 5년간 겪은 일의 1%도 되지 않는다. 의사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세요?”라는 질문은 겨우 잘 감추고 막고 있던 고통의 둑이 터져버리는 계기였다. 그동안 겪은 일들, 감정을 술술 꺼냈다. 그런 이야기를 누군가 물은 적 없었고 나 역시 먼저 꺼내지 않았는데,처음으로 고통을 밖으로 꺼내 보이고 스스로 관찰까지 한 거였다. 의사는 몹시 안타까워인터넷 바카라. 성장기에 겪은 폭력은 내면이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누군가 가해자로부터 보호해 줬다면 조금 나았겠지만, 엄마 역시 피해자였기에 무기력하게 우리를 방치인터넷 바카라.
의사는 내면의 아직 인터넷 바카라 내가 여전히 괴로워하며 울고 있다고 표현했다.오랜 시간 폭력을 경험했지만, 누군가 제대로 보호해 주고 위로해주지 않은 상태로 성인이 됐고, 홀로 감당하며 힘든 감정을 처리하느라 뇌에 과부하가 오면서 우울증이 왔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폭력에 처해있으면 마음이 아픈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위로했다. 의사와 상담하는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우울증이라고 전혀 없는 나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살면서 누구 하나 가정폭력으로부터 나를 구조해주지 않았고, 힘들고 아플 만하다고 공감해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참 의아인터넷 바카라.
‘나는 이제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났고, 안전하게 살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우울증이 찾아온 걸까?’
의사는 그동안 생존하기 위해 아픔의 치유와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것 같다고 말인터넷 바카라.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탈출한 뒤 다음 해에는 수능이었다. 위에 쓴 것 같은 환경에서 공부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기에 재수를 했고, 그다음 해에 대학에 입학인터넷 바카라. 재수하는 동안엔 학비를 버느라 일과 공부를 병행했고, 입학 후에도 잠을 줄여가며 아르바이트를 인터넷 바카라. 정신과를 처음 찾은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생존’하느라 정신없었던 내가 이제 안정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되자 터질 것이 터진 거였다.살면서 반드시 앓고 넘어갔어야 할 고통의 산.언젠가 돌이켜보며 아픔을 치유하고 그 어릴 적의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삶을 살아냈는지 확인하고 쓰다듬어줄 시기가 마침내 툭 하고 터져 나온 것이다.
정신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내게 ‘지랄 맞아서 저런다.’라고 힐난인터넷 바카라. 같은 아픔을 겪은 엄마는 정신과에 가지 않았고 언니들도 멀쩡한데 왜 너만 힘들어하냐는 거였다. 생존이 괴로웠던 게 어떻게 모두에게 평균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처음엔 가족들과 달리 나만 너무 나약하고 어딘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병원에 방문하고 나아지면서 우울증으로 반응했던 자신을 수용할 수 있었다. 똑같이 무릎이 까져도 누군가는 툭 털고 약 한번 바르면 그만이지만 누군가는 덧나기도 하고 염증으로 번지기도 한다. 세상에 모든 상처와 치유가 똑같이 생길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이런 나의 모습 역시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제 내 어린 인터넷 바카라는 울음을 그쳤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정신질환에 완치가 없듯 내 안의 아이는 잠잠하게 지내다가 가끔 마음의 면역이 떨어지면 한 번씩 울어 재낀다. 그래도 괜찮다. 내겐 도움을 줄 병원이 곳곳에 있고, 이런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고, 위급한 순간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휴대전화가 늘 내 곁에 놓여 인터넷 바카라. 그렇게 오늘도 마음속 인터넷 바카라 나를 다독인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느라 고생했어, 정말 대견해, 이젠 편안해지자,라고 어깨를 톡톡 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