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연습할 때마다 나는 하이원슬롯 거인이 된다.
대형마트에 간다. 홍대 거리를 걷고 근교로 여행을 간다. 집을 나서기 전엔 파우치와 지갑을 점검한다. ‘필요시’라고 적혀있는 하이원슬롯이다. 모임이 많은 연말을 앞두고 의사가 챙겨준 약이다.
“연말에 하이원슬롯들도 만나고 즐겁게 보내야 하는데 겁나서 못 나가면 아쉽잖아요. 지갑이나 옷에 몇 개 챙겨 넣고 다니다가 숨이 막히고 어지럽고 공황증세가 느껴지면 즉시 먹어요. 약을 하나 먹어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30분 후에 하나 더 먹을 수 있어요.”
그 하얀 알갱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이 약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사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시작된 후로 사람이 많은 곳에만 가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쇼핑몰에서 열리는 마켓이 있다. 여기서 간식거리와 액세서리를 사고 마지막으로 꽃을 한 다발 사서 돌아오는 게 한 달에 한 번 있는 토요일의 재미였다. 우울증이 재발하고 약물치료를 하는 동안 그 마켓에 간 적 있다.
치료 중이고 제때 약도 먹고 있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환경은 나의 오만함을 내리쳤다. 고작 한 달쯤 약 먹었다고 괜찮아질 리가 없는데 하이원슬롯으로 술렁이는 곳에 발을 들인 나의 오만함. 오랜만에 쇼핑하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던 나의 욕망. 오만과 욕망을 찍어 누를 정도의 강력한 무게감에 숨이 막힌 건 순식간이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하이원슬롯이 꽃만 사서 돌아가자고 했다. 꾸역꾸역 꽃 매장에 가서 대강 앞에 보이는 다발 하나를 골랐다. 그래놓고 다발을 포장하는 그 짧은 시간을 참을 수 없어서 하이원슬롯에게 부탁한 후 혼자 건물 밖을 나갔다. 쇼핑몰 마당의 잔디밭을 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찬바람을 마시며 잠시 서 있으니 숨 막히는 증상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포장된 꽃을 갖고 올라온 하이원슬롯과 만났다. 벽면이 통유리로 된 카페로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매장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착각을 빚으며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조금씩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예전처럼 멀쩡하게 바깥 생활을 하기까지 한참 남았음을 깨달으며 서글퍼졌다.
한 번은 남편과 대형 마트에 갔다. 하이원슬롯 많기로 유명한 코***였다. 재발 이후 온라인 쇼핑을 주로 이용했다. 그래도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파는 것을 사고 싶은 욕망, 또 한 번 터져 나온 이 욕망 때문에 대형 마트에 갔다. 게다가 눈치도 없이 하이원슬롯이 가장 많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하이원슬롯 그날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는 존재가“쟤는 겁도 없이 또 저런 데를 갔네. 어디 불맛 좀 봐라.”이런 심정으로 힘을 발휘한 것만 같았다. 지하 매장에 들어서면서부터 토네이도급 두통이 머릿속을 쓸었다. 발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에서 징이 울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이명은 꽹과리를 쳤다.
그래도 함께 간 하이원슬롯이 신나서 장을 보는 모습을 보며 아픈 티를 낼 수 없었다. 겨우 물건을 넣고 계산대로 갔더니 계산줄이 어마무시하게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때쯤엔 거의 침을 흘릴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 그래도 꾹 참고 계산을 마쳤다. 계산을 마친 후 숨을 고른 다음 하이원슬롯에게 토로했다.
“여보, 나 토할 것 같아. 머리 너무 아파.”
하이원슬롯이 창백해진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렇게 안 좋으면 말을 하지. 왜 가만있었어!”
“네가 너무 신나 해서 산통 깨기 싫었어. 맛있는 거 많다고 좋아했잖아.”
“......”
카트에 기대 비척거리며 좀비걸음으로 차에 탄 나는 시트를 180도로 젖히고 누웠다. 하이원슬롯 없는 차에 들어와 누우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두통은 집에 가서도 이어졌고, 약을 먹은 뒤 한숨 잔 뒤에 겨우 나았다.
그랬던 내가 ‘필요시’라는 이름표를 가진 상비약을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나. 잘은 모르겠다만 상비약은 긴급한 불을 끄는 용도이고, 이 정도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단번에 낫는 약은 아니다. 의사가 말했다. 내 치료가 끝하이원슬롯 날은 꾸준한 약물치료로 전두엽에 살이 오르고 뇌가 튼튼해지는 날이라고.납작해진 전두엽에 살이 오르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그러니 하이원슬롯은 말 그대로 응급처치를 위해 준비하는 약일뿐이다.
대신 상비약은 외출을 앞두고 미리 겁부터 먹는 대신 씩씩하게 나갈 수 있게 도와줬다. 마켓에서 숨 막히던 순간과 머리에서 꽹과리 치던 마트에서의 고통을 경험하며 집 밖에 나가기 싫었건만, 그래도 하얀 알약 하이원슬롯 챙겼다고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란 말이다.
‘상태 안 좋아지면 약 먹으면 되지. 겁낼 게 뭐 있겠어.’
여기에 하이원슬롯 덧붙이는 보너스 대비책이 있다. 상담사로부터 배운 호흡법이다. 상담사는 하이원슬롯이 많은 장소나 폐쇄적인 곳에서 공황증세가 느껴지면 그것은 내 몸이 보내는 비상 신호라고 했다. 그러니 즉시 내 몸을 안정시키기 위한 호흡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일단 어딘가 앉아요. 앉을 곳이 없다면 하이원슬롯 없는 곳으로 일단 피해서 눈을 감고 심호흡해요.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지금 내 몸이 많이 힘들구나, 지금 내 머리가 힘들다고 신호를 보냈구나, 하고 스스로를 달래 보세요. 충분히 심호흡을 하고 증상이 약해지면 장소를 이동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해요. 몸이 지금 여길 벗어나 쉬어달라고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면 안 돼요.”
그러니 내게는 ‘필요시’라는 상비약과 스스로를 구조할 호흡법까지 갖춰진 셈이었다. 덕분에 12월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하이원슬롯들과 즐겁게 지냈다. 심지어 하이원슬롯 많기로 유명한 홍대 거리를 두 번이나 갔다. 남편과 근교로 여행도 떠났고, 하이원슬롯 많은 곳에서 구경을 하고 식사도 했다.
그렇게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연습을 하며 나는 그동안 당연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한 올 한 올 깨달았다. 언제든 갈 수 있었던 마트가, 숱하게 걸었던 홍대 거리가, 사람 북적이던 사이로 찾아가던 맛집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앓고 나서야 주워섬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씩 예전 일상을 복습하는 하루하루가 작은 도전이다. 건강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한 작은 도전이다. 일상을 연습할 때마다 나는 하이원슬롯 거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