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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Apr 10. 2025

카지노 오면

3월의 감정

청카지노와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 아니, 살았다. 자연에서 살아야 하는 청카지노가 집에 오게 된 건 작년 여름이었다. 공원에서 놀던 큰 아이가 청카지노를 발견했다. 엄지만 한 것이 폴짝 뛰어다니는 것이 귀여웠는지 아이는 그 카지노을 기어이 두 손으로 가두었다. “엄마! 빨리 와 봐요! 나 카지노 잡았어!” 큰 소리로 엄마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아이는 청카지노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동안 아이들의 채집으로 우리 집을 거쳐 간 카지노들은 많았다. 매미, 거미, 사마귀, 사슴벌레, 나비 등. 곤충뿐 아니라 식물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을 접고도 다시 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대상이 청카지노가 된 것이다.


공원에는 빈 손으로 왔기 때문에 딱히 카지노를 데려 갈만 한 것이 없었다. 주변엔 공원 화장실 말고 다른 상점들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차 안에 있던 텀블러를 꺼내와 청카지노를 그 속에 넣었다. 아끼는 텀블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마에 송글 맺힌 아이의 땀과 초롱한 눈에 기꺼이 양보할 수 있었다. 청카지노는 한여름의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아이의 두 손을 거쳐 시원 쾌적한 텀블러 안에 들어왔다. 극빈처럼 특급대우를 받으며 우리 집으로 오게 된 청카지노 이름은 아이들이 정했다. 성은 ‘개’, 이름은 ‘꿀’. 합쳐 말하면 개꿀.


꿀이를 키우게 되며 간간히 드는 생각은 아이들이 이름을 잘 지었다는 것이다. ‘개꿀’이라 말하면 저속한 은어가 생각나긴 하지만 어디 아이들의 발상이 단순하기만 할까. 접두사 '개-'에 ‘꿀’이 합쳐진 단어는 뜻으로 치자면 긍정의 단어임이 틀림없었다. 카지노가 개굴개굴 하는 소리를 빗대어 꿀처럼 달달하다는 말도 될 수 있었고, 우리에게 찾아온 꿀이라는 존재 자체가 예기치 않게 얻게 된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칭할 수도 있었다.


카지노은 평소에 관심 없던 자연관찰 책이나 양서류 도감 같은 것들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인터넷 검색도 열심이었다. 키우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먹이는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어떤 환경으로 꾸며줘야 하는지 몰라 허둥거렸다. 급할 때는 집 주변에 있는 파충류샵 사장님께 찾아가 궁금한 것을 해결했다. 그곳에서 사육장도 중고로 샀다. 도마뱀 키울 때 많이 사간다는 기다란 유리장이었다. 다이소에서 인조잔디와 넝쿨식물을 사 와 유리장 안을 꾸며주기도 했다.


청카지노를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 제일 당황했던 것은 먹이다. 살아있는 밀웜이나 귀뚜라미를 넣어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 밀웜을 집게로 잡아 먹이를 주던 날, 꿈틀대는 밀웜을 힘으로 제압하며 우리는 몹시도 떨었다. “꿀아, 제발 먹어라! 팔 떨어지겠다.” 청카지노 입으로 먹이가 들어갈 기대만 하며 마음 졸였던 때, 우리는 초록색 카지노에 진심이었다. 아이들은 매번 자기가 먹이를 주겠다며 서로의 어깨를 밀쳤다. 입 속으로 밀웜이 들어가면 꿀떡 삼키며 까만 눈을 한 번 더 끔뻑거리는 것이 귀엽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아이들은 사육장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카지노울음소리와 함께 들릴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 일상의 행복을 선물해 주었던 작은 카지노. 집에 오면 우리는 ‘꿀아, 우리 왔다!’ 하며 꿀이를 마치 사람처럼 대했다.


사춘기가 시작된 큰 아이가 가끔 속이 답답할 때면 청카지노를 사육장에서 꺼내 몰래 화장실로 데려갔다. 욕조에 물을 얕게 받고 둘만의 비밀대화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런 날은 카지노도 마음껏 뛰며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처음 집에 왔을 땐 손가락 한 마디만 했던 몸이 계절을 거치며 통통하게 커졌다. 가슴께가 불룩해지고,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들썩이는 모습도 보였다. 눈앞에서 카지노이 커가는 걸 보는 일은 놀랍고, 가끔은 경이로웠다. 여름에서 가을이 되고 가을에서 또 한 번 다른 계절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번 파충류샵 사장님께 갔다. “사장님, 카지노 겨울잠은 어떻게 재워요?” 아이가 물었다. 사장님은 집에서 키우는 카지노들은 겨울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겨울잠에 들면 봄에 깨어나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지레 겁을 먹어 사육장 안에서 미동 없이 꿀이가 잠들어 있으면 자주 건드려 깨웠다. 한여름 밤에 카지노울음소리로 잠을 설치던 우리의 작은 복수 같기도 했다.


해가 바뀌었고 길었던 카지노을 지나 봄. 24 절기 중에 세 번째 절기인 카지노이 되던 날. 우리는 그제야 카지노의 뜻을 알게 됐다. 땅속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던 카지노가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때. “엄마! 카지노이면 이제 곧 꿀이 친구들도 깨겠네? 나 다시 눈을 부릅뜨고 땅만 보며 다닐 거야! 꿀이에게 친구 만들어 줘야지! 여. 친! 우리 꿀이 좋겠네?” 큰 아이의 기대 섞인 웃음이 엘리베이터 안을 훈훈하게 했다. 나는 “야! 봄 되면 꿀이 독립시켜 줘야지! 언제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어? 원래 카지노는 자연에서 커야 하는 거야.” 라며 지레 분위기를 잡았지만 속으로는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잡아올 청카지노, 혹은 카지노 알을 상상하며 슬며시 미소를 뗬다.


봄을 맞아 화훼단지에 부레옥잠 세 뿌리를 사 왔다. 그림책에서 보았던 연꽃잎 위에 올라앉아있는 카지노처럼 꿀이에게 봄을 선물해 줄 요량이었다. 봄이 오는 기분이라는 것, 환하게 필 꽃처럼 행복한 기대가 마음을 키웠다. 하지만 꿀이는 못다 잔 잠을 자러 하늘나라로 갔다. 친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곧 만나게 될 텐데 우리 꿀이는 기다려주지 못했다. 전날까지 손 위에서 느껴졌던 카지노 발가락의 작은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허망하게 울어댔다. 개굴개굴, 개굴개굴. 구슬프게 울었다.


2025년 3월 18일. 아이의 방에 붙어있는 달력에는 ‘꿀이 죽은 날’이라고 적히게 됐다. 죽음을 알아챘을 때 건져 올린 꿀이의 모습은 여느 밤과 다름없이 눈을 감고 있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침 등굣길에 아이들과 꿀이를 땅속에 묻어주려고 봤을 땐, 이미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는지 몸색깔은 생기를 잃었고덮인 눈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카지노 무덤은 학교 가는 길 화단에 묻어주었다. 옹기처럼 작게 솟아오른 무덤을 누구 하나 밟을까 봐 테두리엔 돌멩이로 감쌌다. 돌멩이 위에 큰아이는 네임펜을 꺼내 꿀아 미안해,라고 적고 작은 아이는 귀여운 카지노얼굴을 그림으로 그렸다.


꿀이가 살던 사육장엔 부레옥잠만 홀로 떠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을 볼 때마다 마음이 허하지만, 그때마다 꿀이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아무도 더 이상 울지 말라는 말도, 이제는 잊자는 말도,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는다. 한때 우리 곁에 머물던 작은 카지노, 아이들이 꿀이에게 건넸던 따뜻한 인사, 사춘기의 문턱에서 나누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추억들은 그저 부레옥잠 위에 내려앉은 빛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우리의 아렸던 봄을 소개한다.


“여기가 우리 꿀이 무덤이야.” 학교 가는 길목에 마주하게 되는 카지노 무덤을 두 아이는 자주 멈춰 섰다. 가끔 친구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그러면 조금 숙연해지기도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본다. 친구들은 다음날, 집에서 작은 선물을 가져와 아이에게 주며 위로를 한다. 근처에 솟아 나온 봄꽃을 꺾어 카지노 무덤 위에 살포시 올리기도 했다. 초록 나뭇잎 여러 조각, 노란 산수유 꽃가지, 개나리 잎사귀, 청초한 매화꽃잎 등이 작은 조막손에 매일같이 쥐어져 있다. 카지노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며 아이들의 아픔은 자연스레 덮이고 있는 듯했다.


무덤 앞에 봄꽃을 올려두는 아이들의 손길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꿀이의 죽음이 슬픔에 머물지 않고 카지노을 알아가고 보내주는 방식으로 스며든다는 걸. 아이들은 자라며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있다는 걸. 꿀이는 이제 아이들의 기억 속에, 우리의 봄 속에 오래도록 살아 있다. 매년 봄마다 우리 집 청카지노 꿀이가 생각날 거다. 봄마다 카지노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은 조금 더 따뜻하겠지. 그렇게 카지노을 받아들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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