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식 개발자로 10년 넘게 일해왔다.
레시피를 만들고, 기준을 세우고, 공정을 설계하는 일.
정확해야 했고, 수치로 증명돼야 했다.한 그릇의 결과물을 얻기까지 수십 번을 끓이고, 굽고, 볶고 식히면서입으로 알아보고, 데이터로 맛을 설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크랩스이라는,
조금은 더 막연하고,
조금은 더 앞을 알 수 없는 세계로 발을 옮겼다.
처음엔 불편했다.
'이것'만 기깔나게 크랩스하면 되는 나에게 '이것'부터 찾아내야하니까. 실체가 더 없는 걸 자꾸 얘기해야 하니까.
“이런 음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시간대에, 이런 기분일 때 이런 맛의 영양이 담긴 제품이요.”
설득하기 위해 생각해야할 요인이 한 두개가 아니다.
이게 가능할까?
그렇다고 한들 이게 잘될까?
내가 말하는 ‘크랩스 아무것도 아닌 이것’이정말 그 누군가의 크랩스에 오를 수 있을까?
어느 날,
조던 피터슨의 문장을 만났다.
“크랩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원칙상 무한하다.”
오 긁지않는 복권인가?
크랩스이라는 일은
그 ‘크랩스’드러내지 않는 것이기에
이것도 저것도 될 수있고
그래서 그것의 크랩스인것이다.
그 안의 가능성을 조리하고,
마침내 누군가의 크랩스 위에 올리는 것.
나는 이제 그 잠재성을 본다.
크랩스 누가 먹어보지도 않은 맛,
크랩스 출시되지 않은 패키지,
크랩스 쓰이지 않은 문장 속에서
분명히 피어날 무언가를 상상한다.
그 상상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고,
누군가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내가 먼저 믿어준 크랩스이 현실이 되는 순간,
조용히 뿌듯해진다.
그럴 땐
혼자 돈가스를 시킨다.
등심. 바삭. 소스는 꼭 따로.
한 조각 썰어서 입에 넣고
입 안 가득 바사삭 퍼질 때,
나는 살짝 히죽 웃는다.
그래, 이 맛이지.
이걸 해내려고 내가 그 긴 불확실함을 견딘 거지.
아무도 몰라도 나만은 안다.
내 안목은,
꽤 괜찮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