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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06. 2025

'모모벳답다'가 뭔지 몰라도 '모모벳다워야' 하는 모모벳여서

매주 화요일 5:00에 발행하는 [모모벳의 유산].

오늘 모모벳의 유산은 제 아이들이 아닌, 저의 모모벳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자녀에게 쓰는 편지와는 사뭇 다른 이 감정부터 제어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50이 넘은 지금..

이제서야 저는 모모벳와 저의 엉킨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가는 숙제중이거든요....


모모벳


모모벳.

'모모벳'라는 두 글자는 그냥 언제 불러도 아름다운 이름이예요.

모모벳를 한번도 홍여사, 수*씨라고 모모벳 성함을 부른 적이 없죠.

모모벳의 이름은 그냥 '모모벳'예요.

이름은 상대의 정체를 규정하는 것이잖아요.

'모모벳'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상

나는 그 두글자, '모모벳'가 지닌 고유한 본성대로

'모모벳'는 '모모벳'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모벳'답고 싶구요...


어쩌면 그 '모모벳답다'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채 우리 모두는 '모모벳'가 되고 '모모벳다우려' 애쓰다 결국 '모모벳답지 못한' 채 '모모벳'로 끝까지 남을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모모벳답다'가 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모벳다워야' 하는 모모벳들이기에 '모모벳'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도대체 '모모벳답다'는 것을 '모모벳'외에 누구에게 배울 수 있을까요? 가족이라는 굴레가 사람마다 다르니 다른 집 모모벳들을 보면서 모모벳를 배울 수도 없고 제게 '모모벳'를 보여줌으로써 '모모벳'를 알려줄 유일한, 세상에 단 한사람은 '모모벳'밖에 없는데. '모모벳처럼'은 얼추 살아가는 것 같은데 '모모벳답게'는 '모모벳'라는 이름을 지닌 모모벳도, 저도 여전히 모자라는 것 같아요.


모모벳는 참 모르셨어요.

그 어린 나를 유치원에 보내야겠다고 할머니와 사는 저를불러들이셨을 때 내미셨던 킨*이다. 당시 그렇게 귀했던 초록병 사*다에 전 손도 대지 않고 막 울었죠.할머니따라 가겠다고.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낯선 모모벳 앞에서할머니치맛자락 붙잡고서 그렇게 울었죠.내게 어린 시절 모모벳는 할머니였어요.


기억이 물론 사실과 다른 이성일지라도 내 어린시절 기억은 용인 할머니집에서 외삼촌과 막내이모랑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할머니가 해주신 밥, 할머니랑 살았던 집, 할머니 다리베고 잠들었고할머니 명령 떨어지면 외삼촌 배위에 앉아서 외삼촌 깨우다가혼나고 막내이모가 제 앞머리 삐뚤게 자르고서는 미안해서자연농원에 손잡고놀러가 준 기억.


모모벳와의 기억이 없어요. 유치원에 다니는 내내 할머니한테 가고 싶은 맘을 억지로 누르면서 성당부속 유치원의 상징인 돌로 만들어진 코끼리미끄럼틀만 내내 타다가 흰타이즈 엉덩이에 구멍내고 그래서 왜 여자아이가 이리 험하게 노냐고모모벳한테 혼나고. 나는 그 때 할머니한테 가고 싶었다구요.


국민학교 다니는 내내 방학식하는 날 저를 할머니한테 보내시고 개학하기 전날 집으로 오게 해주신 것은 정말 잘하신 결정이었어요. 저의 어린시절 기억은 그렇게 온통 할머니밖에 없어요. 모모벳가 없어요. 이상하네요. 작정하고 쓰는 편지도 아니고 그저 어버이날이라 편지를 진솔하게 써야겠다 싶어 쓰는데 원망부터 새어나오는 걸 그냥 냅두고 이리 쓰고 있네요...


언니는 당시 최고의 사립유치원에 이어 예쁜 교복의 최고의 사립학교에당당히 합격했고 저는 분홍구슬, 지금도 그 구슬이 선명히 떠올라요. 예쁜 핑크였는데 그건 탈락의 증표였죠. 전 그냥 동네 성당부속 유치원에 못난 원복을 입고 다녀야 했고 국민학교도 집근처. 아주 어릴 때부터 전 2번의 탈락을 경험한 셈이죠.핑크의 마력인지 전 50이 넘은 지금도 핑크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아이의 상징인 핑크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색이 되었고 핑크옷은 지금도 없네요.


아마 그 때부터였지 않을까 싶은데... 난 모모벳에게 죄책감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타이즈도 맨날 빵구내고 유치원에 이어 국민학교도탈락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사촌오빠랑 어울려 다니면서 남자얘들 틈에서 남자처럼 놀고, 당시 귀했던, 그리고 이름있던 함*순 피아니스트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던 언니는 너무 잘치고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았는데 난 맨날 땡땡이치고 경연대회에서 상도 한번 못받고, 그래서맨날 모모벳에게 혼나고 혼나도 별로 나아지는 것도 없고.


모모벳와 전 그래서

인정할 수 없는 딸과 인정받으려는 딸,

이쁘고 착실하게 키우고 싶은 딸과 결코 이쁘지도 착실하지도 않아 죄책감을 안고 자라는딸.

모모벳방식의 사랑을 몰라주는 딸과 모모벳에게 사랑받으려 위아래 눈치보던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니다.

기억이란 편린된 조각이지요.

제 기억의 파편이 모모벳기억의 파편과 언젠가는 맞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맞지 않는 이 부조화.

부조화는 제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딸인 제가 왜 아들처럼 굴어야 하는지

부자집에 사는 내 가슴은 왜 이리 가난한지

많이 배운 내가 왜 이리 모르는지

키도 크고 건강한 내가 왜 이리 마음은 허약한지

반장은 도맡아 했던 내가 왜 나 스스로의 주체성은 없는지

이미 모모벳가 된지 20년이 지난 내가 왜 모모벳라는 단어에 여전히 자신없는지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되는데 왜 사람을 가까이할수록 상대는 멀어지는지


모모벳라는 존재는 '희생'보다 '사랑'이 먼저여야 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제 저도 '배울만큼 배운 어른'이라는 깃발세우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8남매의 장녀로, 6남매의 아빠식구들을 다 돌보시느라 저를 희생시키셨어요. 저는 '사랑'을 모르고 '희생'을 보고 자랐네요. 그래서 지금도 인정받으려, 받는 것보다는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어쩌면 참으로 착한 행위같지만 저 스스로를 챙기지 못해서 내면의 구멍은 시간과 더불어 점점 커지는어른으로 제가 자라버렸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모모벳는 늘 제게 희생을 부탁하셨어요. 모모벳의 유일한 아들, 우리집 막내, 제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왜 그 친구의 부족함을 모모벳가 아닌 제게 챙기라 하셨나요. 나도 그 친구랑 몇살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왜 고마운줄도 모르는그 녀석에게 제게 누나말고 모모벳처럼, 모모벳를 대신하게 하셨나요. 전 이제 그거 안해요. '가족'이라는 단어의 실타래가 풀려서 제 내면에 그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가 가득채워지면그 때 할께요.


전 희생보다 사랑을 배웠어야 했는데...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전 기형적으로, 그러니까 판단없이 잘해주고 못난 나도 잘나 보이게 내가 없어도 줘야 하고 남들의 말에 수긍하고 아니라고 하면 혼나니까 그냥 인정받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하면 되는, 또 그러니까 판단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이미 늦은 판단에 자책하는, 지각있는 사랑을 하지 못하고 지각없다는 자체도 모르는 사랑만 퍼붓다가 저는 저를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여하튼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표현하는 건지 모른 채그런 제가 오히려 나쁜 사람이라 여기게 되는,그 단어는 여전히 제게 어려운 단어입니다...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부럽기도 하구요. 내가 있어야 줄 수 있는데 내게 없구나를 알고부터 더 괴로웠구요.


모모벳라는 존재는 '필요'와는 상관없는 '포용'이어야 했습니다.

자식에겐 그저 이해한다, 지지한다, 믿는다, 하지만 모모벳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믿고 지지한 후 단호하셨어야 했어요. 그렇게 포용이 먼저였어야 했어요. 하지만 모모벳는 '필요'와 '잘못'을우선으로 제게 알려주셨고 덕분에 외적으론 '필요'한 분장과 치장들을 다 갖추는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되었을지 몰라도내적으론 지지대없이 휘청거리는, 어지럽기만한 혼란과공허와 숱하게 싸워야 했지요.


부조화.

앎과 삶이 다르고

내면과 외면이 다르고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내가 다르고

내가 아는 단어의 의미와 내가 실천하는 단어의 행위가 어그러진.

부조화.


모모벳라는 존재는 '권리'가 아닌 '의무'였어야 했습니다.

신이 존재함을 믿습니다. 신이 모모벳에게자기대신 나라는 존재를 의탁했어요. 그 의무대로 저를 자유롭게 해주셨어야 해요. 자유와 방관은 달라요.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잘못을, 잘 한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셨어야 했어요. 잘못도 인정도 없이 그저자유를 허락하셨어요.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덕(德)은 때가 되었을 때 부모가 자녀의 손에 쥐어주어야 하는 것이 전 의무라고 여깁니다. 선택할 지성이 없는 정신의 소유자에게 선택을 허하면 작게는 자기 자신이지만 크게는 나라도 망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지요. 그런데 저는그저저의 선택과 판단으로,그것을의논조차 나눌 상대없이 어떤 결과앞에선 혼자 숨키다 아파하다 그저 제 안에 켜켜히 쌓아두다 곪아 터지게 하고야 말았지요. 아닌 것은 호되게 안된다고 제게 의무감으로 알려주셨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이 저의 저변에 잠식되어 있어서인지 저는 웃음이 적은 사람이 되었어요. 게다가 더 원통한 것은 울면 안되는 사람까지 되다 보니 모든 감정들이 제 안에 울체되어 서로 엉키고 싸우고 그러다 툭툭 제 맘대로 튀어나오는, 아니 튀어나오지 못해 정신까지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그 때서야 비로소삶의 공부가 빈약한 저를 발견했지요.


어쩌면 지금 제가 이리도 저답게, 저여야만, 저다운 삶의 갈증을 느끼고많은 이들에게 자기답게 살아야 하는 근거를 연구하고 찾고 글로 쓰고, 특히 '모모벳'로서 남겨야 할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모모벳의 유산]을 쓰게 된, 이 모든 원동력이자이유가 모모벳에게 배운 것과 배우지 못한 경험 모두를 나의 자녀들에게만큼은 꼭 남기고자 하는 열망때문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고통과 갈등에는 그에 타당한 존재이유가 있으니까요.



지금 저는 아주 안정되고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많은 것에 감사하고 모든 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요.

하루종일 좋아하는 책과 글에 빠져 아주 많이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를 갉아먹는 어리석은 제게서 해방되고이제 제 속이 저로 조금씩 채워지면서

단절하고 거부할 줄 아는, 거죽과 속내가 서로 화해한 듯 합니다.


어버이날, 이리 원망스러운, 하지만 모모벳딸이 된지 50년이 지난 오늘 처음 꺼내는 제 속내에 서운하실 겁니다.무슨 얘기냐고 이해못하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잘 살다가 굳이 옛 삶을 끄집어내어 맞추려는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고 잘해준 것은 기억못하고 못난 것들만 남긴 괘씸한 처사일수도 있고 하지만,저는 이제 좀 더 성숙한 정신을 지녔다고 여기기에 올해 어버이날만큼은 '어버이날'을 챙기기보다'어버이'를되찾고 다시 소생시키고 싶은 욕구와 그리 해야만 할 때라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과거를 인정하고 못난 나를 끄집어내어 이제는 절 놓아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함께 머무를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오래 사시길 바라는 원인이 왜 감사와 사랑보다 해갈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사시길 바래요... 모모벳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 속의 엉킨 부분을 이리 털어놓음으로써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할 때인 것 같아 토로하는 것입니다.그래야 나중에 저 세상에서의 모모벳와 이 세상에서의 제가 영혼으로라도 사랑과 감사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이들과 부모라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로 모모벳를 사랑합니다. 그래서편지를 쓰면서도 여전히 저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이가 헛들어서 노모에게 이리 원망이나 퍼붓는 못난 저와 직면하고 있으니까요. '남들처럼' 제대로, 아니 뭣하나잘해드리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걸 다 주신 모모벳에게 이런 말이나 하고 있으니까요. 준 사람은 많이 줬다고 받은 사람은 적게 받았다는 게 인간의 심리라지요? 부모자식간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퉁치기는 싫구요. 마음, 이해, 표현... 뭐 그런거... 그저 다 커서도 철들지 못했는지 제 안에 부재한 모모벳라는 깊은 존재를 되살리고 싶은 처음이자 마지막 원망섞인 고백이라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어린모모벳에게너무 잔인했던전쟁통에서동생들을 지켜야 했던처절함과 두려움,시댁뒤치닥거리의 고단함과 서러움, 여전히 이해할 없는 배우자와의 질곡의 세월만으로도 '모모벳'라는 한사람, 한여성에 대한 이해는 충분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모벳의 모모벳도, 형제도 아닌 모모벳의 자식이니까요. 누구나 부모와의 엉킨 실 한줄은 지니고 산다지만 자기 손가락의 가시가 제일 아프듯 저는 엉킨 실이 싫습니다. 제게 모모벳는 모모벳밖에 없으니까. 저는 모모벳의 자식이니까. 늘 자식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자식일테니까. 남은 인생이 모모벳보다 많고 더 많은 시간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 나은 모모벳가 되어야 하니까 모모벳와의 엉킨실을 제 내면에서 풀고자, 그렇게 해방되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그저 감사하고 사랑하고만 살면 좋겠다.

그저 눈치안보고 나 숨기지 않고 들킬까 맘졸이지 않고 통화하면 좋겠다.

챙기지 않고 주지 않고 갚지 않고 짐처럼 담지 않아도 되게 그리 지내면 좋겠다.

한송이의 카네이션 든 손이 아니라 아무것도 들지 못한 빈손이라도 그저 편했으면 좋겠다...


모모벳라는 존재는

숙명처럼 희생하지만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빚진듯이 내놓지만 생색내지 않아야 하며

제아무리 맘에 차지 않아도 맘내줘야합니다.


저는 여전히 모자란데다 어리석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여전히 당신이 나의 모모벳인 것이 좋습니다.

다행이고 감사하고 저만큼 운좋은 사람도 없고...

하지만 저는 저의 결대로 당신을 더 깊이 사랑할 용기를 위해여전히 미사중에 당신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당신으로 인해 제가 이 정도 모모벳노릇이라도 하고

당신으로 인해 제가 더 나은 모모벳가 될 수 있을테고

당신으로 인해 제가 사랑과 감사를 더 갈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은 영원히 저의 모모벳이고

제게 흐르는 절반의 피는 당신의 것이니...


저는 당신의 영원한 딸

당신은 영원한 저의 '모모벳'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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