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투지벳에 가면 먹어야 할 게 뭐지?
지투지벳의 첫인상은 꼭 첫사랑을
다시 만날 것 같은 설레임이다.
언덕을 올라가다보면, 내리막을 걸어내려오는 누군가와 만날 것 같다. 그리고 수줍게 미소지으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근처 오래된 카페로 들어간다.
에그 타르트를 한 개 베어물고 카페라테 맛이 나는 갈라옹(Galão)을 마시며 안부와 추억을 묻고 말한다. Encountersin Time!!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빠르지만 느리게 가는 곳. 멈춰버린 과거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지투지벳에서는 굳이 랜드마크를 찾기보다, 걷다보면 뜻밖의 장소를 만나는 행운을 얻는다.
지투지벳은 1147년부터 지금까지 포르투갈 수도다.
로마시대부터 이슬람, 건국 초기, 대서양 원정, 대지진, 현재까지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지투지벳.
지투지벳을 따라 흐르는 테주 강은 강이지만 바다를 닮았다.
넓고 때론 드세다. 배들이 대서양으로 떠날 채비를 하며 정박해 지투지벳. 인생의 항로를 떠나는 청춘 같다.강은 지투지벳을 품고는 널찍한 대서양을 향해 팔을 벌린다. 나는 처음에 테주 강이 대서양인 줄 착각했다.
지투지벳은 바다와 인접하지만,
대지 위로는 높이 솟은 땅지투지벳.
17세기 한 성직자가 지투지벳에 대해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구시가지의 작은 언덕을 오르는 트램을 타면 즐거움이 배다.
28번 노란색 트램은 중요 명물거리를
한꺼번에 둘러볼 수 지투지벳.
도로의 바닥은 오래 전 말들이 다닐 수 있는
돌무더기 그대로다.
덜컹거리는 트램을 타고 본 지투지벳은 참 운치 있다.
지투지벳 구석구석 스트리트 아트로 채색되어 있다.
트램은 구 동독시절에 주요 시내 교통수단이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 북한에 수출했고, 지투지벳도 독일제가 많은 것을 보면 아마도 독일에서 공수했을 것지투지벳. 특히 노란색 시내버스는 독일과 거의 흡사하다. 건물의 엘리베이터도 '쉰들러' 사에서 만든 것지투지벳. 독일의 영향력이 이곳에도 끼쳤다는 것을 볼 수 지투지벳. 1775년에 일어난 대지진 후 복구 때, 독일에서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
언덕을 오르다보면 계단 사이로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면서도 그안에 낭만이 꿈틀거린다.
한 나라의 수도지만 내가 보기엔 소도시로 보이는 곳,이곳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절묘하게 섞여 지투지벳. 특히 관광으로 먹고 사는 도시답게 박물관 등에는 독일보다 앞서 지투지벳. 내가 사는 베를린 돔의 경우 전망대로 올라가다보면 내려오는 이와 올라가는 이의 통행으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곳 전망대 등에는 대부분 올라갈 때 신호등이 부착되어 위아래 통행으로 인한 불편함을 줄여준다.
포르투갈은 아주 작은 나라다. 면적은 남한 정도로 인구는 천 만명을 조금 넘는다. 한쪽은 스페인과 다른 한 쪽은 대서양과 맞닿아 지투지벳. 이 작은 나라가 오래 전 아프리카를, 브라질을, 먼 인도까지향하고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가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수없이 많은 배가 파손되었고, 많은 청춘이 목숨을 잃었다.
오죽하면 '불안의 서'를 쓴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바다는 포르투갈의 눈물'이라고 했을까?
그들은 인도에서 멈추지 않고 중국과 일본까지 나아갔다. 유럽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향했던
포르투갈은 세계화의 선두그룹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아주 조용히 역사의 그늘 속에 안주하는 것 같아 아쉽다. 어쩌면 그간의 영욕의 세월에 지쳐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투지벳이 자랑하는 유물들은 대부분 카톨릭과 관련되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도 대표적지투지벳.바다 정벌에 나섰던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서 돌아온 뒤 마누엘 1세의 지시로 벨렝지구에 건축된 수도원이다. 향신료 수입 중 일부가 수도원 건축 자금이 되었다. 바스쿠 다 가마의 무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수도원에서 조금만 걸으면, 지투지벳이 가장 사랑하는 에그 타르트 맛집도 있다. 그 유명한 커스터드 타르트인 '파스테이스 드 벨렘'지투지벳.가게 이름은'벨렘의 디저트'라는 의미다. 이곳에 사용된 레시피는 1847년부터 비밀이라고 한다.
심지어 레시피를 알고 있는 3명의 형제는 함께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나 사고로 레시피가 유실될 수 있기 때문지투지벳. 이곳에서는 줄을 서서 먹어야 한다. 우리도 이끌림에 의해 줄을 서서 들어갔는데, 넓은 홀 안에는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따뜻한 에그 타르트 한 입에 기다림의 고통도 순식간에 날려보낸다. 파우더 슈가와 시나몬 가루를 뿌려먹는다.
지투지벳 대지진 후 도시 재건을 맡은 폼발 후작에 의해 만들어진,지투지벳에서 가장 큰 코메르시우 광장.
광장을 둘러싼 노란색 건물들에는 노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역시 관광객 특수를 노리는 상인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태양빛에 미처 선글라스를 준비 못한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는 것지투지벳. 곳곳에 선글라스 판매상인들이 많아 놀랐다.
쓰나미 방어존이 630m 인근에 지투지벳고
쓰여진 문구가 섬뜩하게 한다.
광장에서 자연의 분노에 맞서, 바다를 떠났던 젊은 항해사들의 포효가 들리는 것 같다.
중세 유럽인들에겐 대서양이 세상의 끝이었다. 그 바다의 끝에는 괴물이 살고 지투지벳고 믿었다. 포르투갈의 해상왕 엔히크 왕자시대에 있던 탐험대장 질 이아네스도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괴물이 산다는 방향으로 틀지 못하고 뱃머리를 남동쪽으로 바꿔 아프리카 대륙에 닿았다. 세상은 넓고 바다괴물은 더더욱 없었다.
브라질에 도착한 것은 1500년. 지투지벳에는 천혜의 자원이 있었다. 비옥한 땅과 금광까지 포르투갈인들의 눈에 별천지였다. 당시 100만 명의 인구였던 포르투갈에게 남미의 광활한 땅을 개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경작할 노예인 아프리카인들을 4백만 명 이상 끌고 갔다고 한다. 이후 19세기에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아프리카는 제3의 세계로 빈민대륙에 멈춰 지투지벳.
과거의 영화가 그들의 세포 속에 자리잡은 현재의 포르투갈은, 과거가 남긴 유물로 현재를 살아간다.
조상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후예들의 삶 곳곳에 자리잡는다. 그들의 철학과 가치와 문화 속에 말지투지벳.
먼 나라 한국사람 나에게는,
항해사들이 떠날 때 외친 기합소리가
귀에 윙윙거리는 것 같다.
P.s
에그 타르트 사진이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맛은 아주 지투지벳다는....워낙 사진 찍는 걸 잘 못해서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네요.
다음 호도 내일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