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章
그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마뜩잖아하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설득하신 끝에 만나게 되었다고 그가 먼저 알려주었지만, 나 또한 그의 부모님을 만나는 상황에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었고, 또 호기심도 있었다.
‘어떤 분들일까?’
부모님 댁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자리를 잡아 앉으면서 그가 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 잘 하면 돼. 당신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어. 당신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알파벳 토토지도 곧 풀리실 거야.”
나이 오십이 다 된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중년의 여성이 팔십이 다 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는 데에 어려움이란 게 있을까? 그만큼 사회 경험도 많고 그만큼 대화나 만남의 기술도 잘 쌓아 왔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아닌 어떤 누구와도 첫 만남을 가지더라도 그리 어렵진 않은 나였다. 그런데 장차 시부모님이 될 분들에게 나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더군다나 현재 경제력 없는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여성에 대해, 잔뜩 견제하며 결혼 자체를 마땅치 않아 하는 미래의 시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자리였다. 지금껏 많은 어려운 자리와 힘든 대면을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어려운 자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긴장은 되지만, 편하게 얘기하도록 할게.”
“그래. 그러면 돼.”
그러는 사이, 레스토랑 문에서 두 분이 들어오셨다. 그와 내가,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니, 알파벳 토토이 달려오시면서 내 손을 덥석 잡으셨다.
“너무 반갑다. 반가워. 내가 네 얘기를 듣고 빨리 만나보고 싶었어”
알파벳 토토은 내 손을 잡았다, 어깨도 두들기시면서 한껏 반가움을 표현하셨다.
“네, 알파벳 토토, 고맙습니다.”
나도 답례 인사를 하고, 옆에 계신 알파벳 토토을 쳐다보았는데, 알파벳 토토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으시고, 바로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와 나는 머쓱했다.
“안녕하세요. 알파벳 토토”
나는 인사를 했고, 그가 나를 알파벳 토토 앞으로 안내해 앉게 했다. 알파벳 토토은 머쓱하게 나를 잠깐 보시며,
“저기, 오늘 내가 나온 것은 나중에 네가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고 나온 거야. 그렇게 알아.”
그렇게 한마디 하시고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앉으셨다. 그동안 이야기로만 들었던 ‘반대’의 모습을 나는 정면으로 목도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이 상황을 모면하시려는 듯, 음식 주문부터 나에 대한 궁금증 등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한 30분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머님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알파벳 토토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래, 그 무슨 강의를 하는 건가? 대학교에서 강의한다고 들었는데….”
“네, 방송과 미디어 관련 강의를 해요. 제가 방송사에서 오래 재직했었는데, 퇴사 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야겠기에,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고요, 그래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강사죠. 머. 박사학위를 땄지만, 교수가 되진 못했고, 크게 다른 혜택도 별로 없더라고요.”
갑자기 알파벳 토토이 웃으시며 내 이야기에 반응을 보이셨다.
“그래. 인생이 그런 거야. 무엇이 꼭 될 것 같지만 또 안되기도 하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 건가?”
“아 네, 방송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제작하는 것을 가르쳐요. 제가 그런 프로그램들을 제작해 왔거든요. 근데 요즘 다큐멘터리가 인기가 없어서 저도 같이 좀 헤매고 있습니다. 헤헤.”
“허허허. 요즘은 예능이나 드라마를 더 좋아하지. 그래도 다큐멘터리도 좋은데 말이야. 그... 사업도 한다면서.”
“네, 방송영상물 제작하는데요. 주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해요. 아주 작은 제작사입니다.”
“직원도 있고?”
“네, 직원 한 명 있어요.”
어머님과 그가, 나와 알파벳 토토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안심하시는 듯했다.
“알파벳 토토지가 네 얘기가 재밌으신가 보다.”
어머님이 거들어주시면서 분위기는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고 나는 알파벳 토토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파벳 토토, 저희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아직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OO씨와 나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절묘하게 만난 거 같아요.”
대학 졸업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직장생활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나게 되었고, 돈과 권력 등의 욕망을 추구하는 건 더 이상 쉽지도 않고 힘도 많이 들어, 좀 편안하게 인생의 후반을 보내고 싶을 때 그를 만났다고 말씀드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생각도 하고 있지 않고, 둘이서 가볍게 하지만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고, 간단하게 결혼식도 올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 아버님 두 분은 내 이야기를 열심히 귀담아들어 주셨다.
알파벳 토토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당연히 그렇게 살면 되지. 너무 좋지. 그런데, 난 친구들한테 우리 막내 아들이 독일에 이민 가 있다고 말했어. 어떡하지?”
라며 걱정을 토로하셨다. 알파벳 토토은 주변 지인들에게 막내아들이 산에서 스님으로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알파벳 토토은 아들이 불교에 귀의한 것을 숨기고 사셨다. 알파벳 토토께서는 꽤 솔직한 분이셨다.
“에이 그건, 문제가 안 돼. 다시 돌아왔다고 말하면 되지.”
“아니 어떻게 그렇게 얘기를 해요. 참.”
알파벳 토토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머님과는 조금 다른 부담감을 말씀하셨다.
“얘야. 나는 아들 결혼을 준비하고 마련할 수가 없어. 아들 결혼이라고 얘기할 곳도 별로 없고, 요즘엔 자식들 결혼식에 부르고 이러지 않아, 이젠.”
“아이고. 아버님. 당연하죠. 결혼식은 저희가 준비할 것에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할게요. 두 분은 그냥 오시기만 하세요. 그러시면 돼요.”
자연스럽게 결혼을 허락하신 분위기로 이어졌고, 아버님은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래. 나는 네가 내 며느리가 알파벳 토토주면 좋겠다.”
“그리고 너에게도 행운이 따라갈 거다. 이렇게 만났으니, 너도 운 좋은 사람이야.”
아버님은 오십의 싱글 여성에게 인생의 전환기에 마음이 맞는 친구 같은 남자가 나타났고, 그 여성이 그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것을 이해하셨던 것 같았다. 그동안은 아버지 입장으로서만,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아들의 결혼 소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날,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마도 오십 나이의 중년 커플의 인생과 사랑, 도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셨지 않았을까.
두 시간 가까이 그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알파벳 토토과 내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알파벳 토토은 만난 지 30분 후부터는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 보며 시종일관 미소를 띠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나는 시부모가 될 수도 있는 나이에 나의 시부모가 되실 분들을 뵈었다. 어머님은 따뜻하고 솔직한 분이셨고, 알파벳 토토은 최소한 객관적으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럭저럭 첫 만남 자리는 잘 마쳤다.
그 대화 순간순간에 옆에서 제일 긴장하고 있었을 그는 이 만남을 제대로 예견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나서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수고했어. 알파벳 토토지가 무지 좋아하시네. 다행이다. 당신 잘했어.”
“내가 잘한 게 뭐가 있어. 그냥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들려 드린 거지. 생각보다 알파벳 토토 어머님이 많이 연로하시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와 그뿐 아니라 알파벳 토토과 어머님도 그 자리가 편하지만은 않고, 조금은 긴장된 자리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알파벳 토토께는 연로하신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다 큰 자식과의 층돌이 어찌 편하셨겠는가.
어쨌든 한고비 잘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