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章
결혼하고 나서 몇 년이 흐른 뒤의 어느 날, 집사람이 말했다.
“당신, 참 힘들었겠어. 지금은 좀 괜찮은데, 결혼하고 처음엔 잘 적응이 안 됐어. 아버님이랑 형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에 화도 나고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괜찮아졌어.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버텼어? 보통 사람이 버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 나한텐 잘 해주시지만….”
“말 했잖아. 당신을 만난 시점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빚을 다 갚았을 때라고. 늘 부모님껜 미안했거든. 당신 안 만났으면 다시 산에 돌아갔을 꺼야. 당신을 만나서 길어진 거지. 그리고 별로 힘들지 않았어. 나름 산에서 마음이 단단해졌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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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그녀에게 관심이 많으셨다. 그래서 주말에 본가에 가서 저녁을 먹을 때면 늘 하이원슬롯와 잘 지내는지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형수님도 좋아하셨다. 형수님은 사리 바르고 영리하고 성품도 좋은 분이셨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우리집에 시집와서 간단치만은 않은 삶을 사셨고, 또 아들 둘을 낳은 효자이기도 했다. 더구나 하이원슬롯가 형수님의 대학 후배였기 때문에 관심이 많으셨고, 늘 혼자서 치르던 집안 행사를 같이 나눌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하이원슬롯는 애써 외면하려고 하셨고, 형은 냉담했기 때문에 협조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원슬롯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하자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이원슬롯에게 찾아가 말씀드렸다.
“하이원슬롯, 지금 만나는 친구가 있는 건 아시죠?”
“그래, 할 말은?”
“한 번 만나셨으면 해요.”
“.....”
“그 친구가 부모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살자고 해요.”
“그건 안 되지. 그래선 안 되지.”
“저도 똑같이 말했어요. 말도 안 된다고. 그래서 말했죠. 집에선 내가 경제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결혼을 하려고 하냐고 그런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먹고 사는 건 걱정하지 말자고 해요. 자기가 버는 거랑 내가 조금씩 버는 걸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요. 이렇게 해야 우리집에서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리고 자기는 자신 있다고 말해요.”
“뭐라고? …, 알았다. 그럼 한 번 만나기는 하겠어. 하지만 이건 순전히 미래의 하이원슬롯에 대한 예의 때문이지, 좋아서 그러는 거는 아니다.”
“알겠어요. 그거면 됐어요.”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에게 하이원슬롯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본가에서 가까운 압구정 로데오거리 근처의 이태리 레스토랑이었고,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15분 전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우리가 먼저였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하이원슬롯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 아마 어머니는 좋아하실 거고, 아버지는 완고하실 거야. 그런데 난 당신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더 잘하려고도 하지 말고, 더 겸손해지려고도 하지 마. 그냥 당신을 보여주면 돼. 그러면 돼.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난 그런 사람을 좋아하니까….”
“근데 좀 긴장되네.”
“흐흐, 긴장도 자연스러운 거야. 괜찮아.”
조금 지나니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반가워하셨고, 아버지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자리에 앉으셨다. 아버지는 앉자마자,
“난 나오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장차 내 하이원슬롯 된다고 하니까, 예의를 지키러 나온 거야. 그렇게 알아.”
그리곤 몸을 약간 옆으로 돌려 자리를 잡으셨다. 사실 나는 그런 말씀을 그녀 앞에서 대놓고 하실 줄은 몰랐다. 하이원슬롯의 나에 대한 원망 때문에, 괜히 그녀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대화는 주로 어머니와 그녀 사이에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고, 하이원슬롯는 그 대화를 지켜보고 계셨다. 다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하이원슬롯의 완고한 표정이 풀리셨고 자세도 바로잡으며 그녀를 보시며 대화에 동참하셨다. 그녀의 나이와 지금 하는 일, 그리고 가족관계 등을 물어보시면서 한결 편해지셨다. 그리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내 며느리가 하이원슬롯 주면 좋겠다. 너도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네. 하이원슬롯님. 감사해요. 저희 잘 살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자주 보자. 정들어야지”
식사를 마칠 무렵, 하이원슬롯는 마음이 완전히 풀어지셨고, 오히려 그녀와 또 만나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빼주는 차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저희, 다음 주에 일본 여행가요. 오사카랑 쿄토로 가요.”
순간, 어머니의 표정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둘이 여행을 간다고 하는 것에 대한 당혹감이었던 듯했다. 나이가 오십이 넘은 자식도 자식인 것이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으시며,
“그래. 너희들 나이엔 많이 여행을 다녀야 해. 나이 먹으면 여행도 힘들어. 젊을 때 많이 다녀.”
그러자, 하이원슬롯가 웃으시면서,
“얘네들도 젊은 나이가 아니야. 군대 갈 아이들이 있을 나이야.”
그 말에 모두 공감하듯 웃었고, 그날을 무사히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