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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 Feb 28. 2025

그 계절은 라이징슬롯

에필로그 - 우린 언제까지고 그때 라이징슬롯를 꺼내겠지

첫라이징슬롯다.


거실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그마저도 드문 드문 마르지 않을 정도만 똑 똑 떨어졌다. 마감을 하루 앞둔 원고가 첫 줄부터 꽉 막혀서 도무지 나가질 못했다. 시선은 자꾸 노트북 화면 뒤로 달걀노른자, 땅콩버터, 빵 부스러기가 바짝 말라 붙은 접시로 쏠렸다. 여행지에서 여행에 관한 글을 쓰는 건 고통이다. 게다가 그 배경이 현재 머물고 라이징슬롯 곳이라면 더욱. 정리되지 않은 이야길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재주가 내겐 없다고 자책하며 애꿎은 자판만 괴롭히다 몇 시간이 간다. 이럴 시간에 나가서 무슨 사건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다.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미간 찌푸린 채 완성되지 않은 첫 문장을 되뇌었다. 그랬더니 곧 눈가가 하얗게 밝아졌다. 그럴싸한 말이 떠오른 게 아니다. 창 밖이 아까보다 밝아진 것이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떨어지던 비가 언제부터였는지 눈으로 변해 창틀 위로 도톰하게 쌓여 있었다. 톱밥처럼 묵직하게 떨어지는 눈발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첫라이징슬롯다. 올 겨울 아니 라이징슬롯에 와서 처음 보는 눈이다.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패딩 점퍼와 모자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집을 나섰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은 비단 술뿐만이 아니다. 그간 머문 도시마다 적어도 하나씩 이런 것들이 있었다.

라이징슬롯
라이징슬롯
라이징슬롯

2024년 1월 6일. 크리스마스는 물론이고 해가 바뀐 후에야 라이징슬롯이 내렸다. 후에 듣기로 그해 겨울이 유난히 따뜻하고 메말랐단다. 하긴, 친구들의 겨울 라이징슬롯 얘기엔 눈과 칼바람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내가 있는 동안 눈 소식은 기상 정보로 세 번, 내 기억에는 두 번뿐이었다. 그중 하루 그것도 사십일 넘게 기다렸던 라이징슬롯이니 맘은 급하고 걸음도 자꾸만 빨라질 수밖에. 브루클린 하이츠 산책로에 들어선 뒤 한참을 가쁜 숨 몰아 쉬어야 했다. 그 사이 눈발은 점점 더 거세졌고 그럭저럭 막아 내던 패딩 점퍼에도 군데군데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도 춥지 않았다. 가슴팍에서 연신 솟는 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눈에 닿는 것들이 하나같이 포근해 보였다. 하얀 점 흩뿌려지는 산책로의 모습, 희미하게 보이는 브루클린 다리와 맨해튼 스카이라인, 일찌감치 불 밝힌 가로등까지.

땅과 강, 고층 건물들이 라이징슬롯의 얼굴이라면 날씨는 이 도시의 표정이다. 그리고 어느 도시 못지않게 그 차이가 선명하다는 것이 날씨의 아재가 내린 결론이다. 화창한 날과 구름 가득 낀 날의 타임스퀘어는 서로 다른 대륙인 양 딴판이었고 비 오는 날 시내 공원들은 평소보다 차분하거나 낭만적이었다. 창 밖으로 내리는 라이징슬롯을 보자마자 맨해튼이 가장 넓게 보이는 브루클린 하이츠를 찾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마주 본 겨울의 표정은 기대와 달리 온화했다. 어떤 화창한 날 보다도.

넌 밝은 눈동자를 가졌어.

만약 내가 네 친구라면 이런 밤에도 단번에 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타임 아웃 마켓 옥상에 있는 전망대에서 난간에 기대 새파란 도시의 밤을 바라보는 나를 부른 이의 마지막 인사였다. 기꺼이 라이징슬롯 마지막 밤의 기념사진을 찍어준 것에 대한 인사치레였겠지만 하필이면 그것이 스무 살 언저리에 들었던 고백과 맞아떨어졌던 터라 괜히 맘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하나 더 떠올랐다. 누군가 사랑하고 싶다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후로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건 고사하고 홀로 여행 중인 스스로에게는 그런 상대일까. 머리가 질문을 주고받는 동안 눈이 닿는 것들을 훑으니 하나같이 언젠가 내가 꿈꿔 왔던 것들이다. 라이징슬롯이란 도시, 눈 내리는 겨울밤, 젖을 걱정 없이 걷고 힘든 것 모르고 오를 수 있는 마음 같은. 이런 순간에 데려다 놓은 걸 봐선 그래도 아주 나쁜 파트너는 아닌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바지며 양말까지 흠뻑 젖었다. 하얀 후드 티셔츠는 녹색 얼룩들로 엉망이 됐다. 왁스 코튼으로 만든 카메라 스트랩에서 빠진 물이 스며든 것이다. 식었던 몸과 젖은 카메라, 다른 옷들도 곧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후드 티셔츠의 자국만큼은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올 때 버리고 올 생각이었던 그 티셔츠를 요즘 종종 방에서 팬티 바람에 입고 그 시절을떠올린다. 얼룩이 여기저기 남아서 입고 외출하긴 쉽지 않겠지만 그 하자들이 소중하다.라이징슬롯라이징슬롯가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도 이리저리 부딪히고 찢겨 생긴흉터들이다.


간간히 라이징슬롯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날 밤의 정적은 오후보다 더 깊었다.빨간 소파에 앉아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작 사흘 머문집이 서울의 내 방보다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긴 안도의 한숨 끝에 이어진 생각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어디 짧게 라이징슬롯이라도 다녀올까?'




다분히 개인적인, 때로는 호들갑인 이야기들에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눌러 주시는 라이킷이 큰 힘이 됐어요. 허락된 분량이 30편이라 잠시 쉬고 이어 가려고 합니다. 아직 떠들 얘기가 많이 남았어요. 그동안새 봄, 멋진 계절 맞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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