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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r 30. 2025

아슬롯사이트의 자서전

그리움을 쓰다 1

어릴 적, 아슬롯사이트가 술 한잔 얼큰하게 취해서 집에 오실 때면 우리 삼 형제를 불러 앉히고 늘 하시던말씀이 있었다.


"슬롯사이트는 육십까지 살기 힘들 테니, 너희들은 어머니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한다."


어린 우리는 아슬롯사이트가 무슨 몹쓸 병에 걸리신 게아닌가싶어 그 말이 싫고 무서웠다. 그때 아슬롯사이트는 겨우 40대 반쯤이었지만, 각박한 서울살이를 겨우겨우몸으로버티고 계시던 시절이었다.돌이켜 보면, 혹여 당신께서 일찍 세상을 떠난다 해도 형제지간에 우애 있게 살아야 한다는간곡한당부의 말씀이었던 것 같다. 비록아슬롯사이트의삶은질곡이 많았지만,다행히도하늘이주신 축복으로 여든아홉까지병 없이 사시다가 몇 년 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슬롯사이트를 선영에 모시고 난 후, 상실의 아픔이 커지면서 당신의 척박했던 삶과 그리움을 담은 회고록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한 채 1년여 세월이 흘렀다.아슬롯사이트구순을 맞아 선영에 다녀온 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내 마음속 아슬롯사이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부여잡고 펜을 잡았다.


회고록을 쓰고자 했던 생각의 중심에는 당신께서 남기신 육필 자서전이 있다. 내가 아슬롯사이트의 자서전을 처음 발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다락방에서였다. 수년 전 고향 땅을 뜰 때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풀지 않은 듯한 박스 안에는 뜻밖에도 아슬롯사이트의 묵은 기억을 간직한 자서전이 들어 있었다.


1932년생이신 아슬롯사이트가 대여섯 살 첫 기억부터 스무 살 중반쯤 어머니를 만난 때까지 기억을 써 내려간 글은 260여 쪽에 달했다. 앞뒤와 중간에 일부 누락된 페이지가 있었지만, 누렇게 바랜 종이 색깔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간직한 아슬롯사이트의 삶을 다락방에서 밤새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아슬롯사이트를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슬롯사이트 글의 첫머리는 동네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해가 지도록 놀던 기억부터깊은 물에서 미역을 감다가 죽을 뻔했던 얘기로 시작한다. 소에게 꼴먹이러 가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과 놀지못하는 분풀이로애꿎은 소를발로 차며 미워하던 어린 날 천진한 모습한 폭의 수채화로 담겨있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 아슬롯사이트(나의 할아슬롯사이트)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어가던 기억을 묘사한 장면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내가 아슬롯사이트의 손을 잡고 국민학교 입학식에 갔던 그날과 똑 닮은 풍경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도 나는 아슬롯사이트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들판을 가로질러 철도 길과 신작로를 따라 십리 길을 걸어갔었다. 어쩌면 아슬롯사이트는그 옛날이 그리워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데리고 입학식에 갔을것이다.


10살이 되어 한창 뛰어놀아야할 때,, 장티푸스에 걸려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아슬롯사이트 등에 업혀 한의원을 오가며부모의 가슴에 많은 눈물을적시게 했다.

"우리 막내! 제발 죽지 말고 살아만 다오!" 하시며 애닮픈 부모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다행히 완쾌되어 환한 웃음을 안겨주었지만,마을에 돌림병이 돌아아슬롯사이트 어머니가 동시에 앓아누워사경을 헤매시다가,결국 아슬롯사이트는깨어나지 못하시고 만다. 14살 어린 나이에 아슬롯사이트를 여의고 막내로서 겪어야 했던 설움은 당신의 아픈 삶의 서곡이었을 것이다.


형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몇 년이 지난 스물한 살 늦은 나이에 아슬롯사이트는 고등학생(전주농고)이 된다. 6.25 전란이 막 끝났던 때, 당시 대부분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지만, 스무 살이 넘어 입학한 아슬롯사이트는 몇 살 아래 동생 뻘 학생들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다. 의욕은 있으나 늦은 나이에 학업을 따라갈 수 없었던 아슬롯사이트는 공부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ABC, 코싸인, 탄젠트'(아슬롯사이트는 영어 수학을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몰라도 체격이 좋아 운동에는 자신 있었던 아슬롯사이트는 선배의 눈에 띄어 유도부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전주농고 유도부는 전국 대회를 제패할 만큼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한다. 그때부터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운동만 전념하면서, 3학년 때는 유도부 주장이 된다.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이웃 학교 학생들과 잦은 싸움으로 교무실에불려 다니기도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작은 우상이 되기도 했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갔던 시절은 아슬롯사이트에게 가장 젊고 멋진 청춘이었던 것 같다.어렵사리 수학여행비를 마련해서 처음으로 먼 길을 여행하며 느낀 감정을 써 내려간 글은 그 당시 아슬롯사이트가얼마나 행복했었는 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졸업을 하고 유도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경제적인 사정으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으로 전주 뒷골목을 방황하던 젊은 시절 얘기는 아슬롯사이트가 겪어야 했던 가장 아픈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황하던 그 시절, 한 동네 사는 어머니를 몰래 흠모하며 어머니의 동생(나의 외삼촌)을 꼬드겨 편지를 건네주던 수줍은 연애가 시작된다.(그 당시 아슬롯사이트는 결혼한 형님을 따라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오래되지 않았던 때였다). 아무 꿈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를 만난 것은 아슬롯사이트에게 삶의 희망이었을것이다.또, 바야흐로 우리 가족사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우리 삼 형제가 태어나고 손자 손녀까지 열넷이나 되는 작은 왕국을 이루신 시작점을아슬롯사이트의 글을 통해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슬롯사이트의 육필 원고는어머니를 만나 잠 못 이루며 연애편지를 쓰던 스믈다섯 청춘에서 아쉽게 끝을 맺는다.


나는 이 글을 밤을 새우며 단숨에읽고, 비로소 내가 태어나기 전 아슬롯사이트를 알게 되었던 그 순간, 아슬롯사이트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아픔으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할머니로부터 아슬롯사이트의 젊은 시절 얘기는 몇 조각씩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자세하게 아슬롯사이트의 성장 과정을 쓴 글이 없었다면 절대 모를 일들이 글 속에서 나를 깨우고 있었다.

슬롯사이트아슬롯사이트의 육필원고

나는 이 글의 존재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책상 서랍 깊은 곳에 수십 년을 고이 간직하다가, 아슬롯사이트 칠순 잔치 때 모든 친지들 앞에서 공개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그 귀한 글상자를 돌려보며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당신의 자서전이 여태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계셨던아슬롯사이트는 많이 놀라하시며 겸연쩍은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내 서랍을 떠나 아슬롯사이트의 장롱 속에서 깊은 잠에 들었던 육필원고를 어느 날 당신께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고 계셨다. 건강하시던 아슬롯사이트가 갑자기 급성폐렴으로 입원하셔서 돌아가시기 불과 3 개월 전쯤이었다. 그동안 꼭 한 번 읽어보시라고 몇 번을 권유했으나 “다음에 읽으면 되지, 뭐!” 하시며 미루고 미루시던 아슬롯사이트였다. 쉬엄쉬엄 며칠에 걸쳐 다 읽으시고 난 후, 낱장으로 되어있던 자서전을 노끈으로 꼼꼼히 묶으시더니, ”이제 이건 니가 간직하거라! “ 하시며 나에게 건네주셨다. 자서전 묶음을 받으면서, “젊은 시절 쓰신 글을 60여 년 만에 다시 읽으시니 어떠셨어요?” 하고 웃으며 여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계시던 아슬롯사이트는 “좀 유치하다, 야! “ 하시며 쑥스러운 듯 웃으셨다. 지금도 맑은 그 웃음이 눈에 선한데, 아슬롯사이트는 안 계시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슬롯사이트는 당신의 머지않은 죽음을 예견하고 계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 켠이 쿵 무너진다.


짧지 않은 세월, 60여 년을 아슬롯사이트와 함께했지만, 돌이켜보니 우리 곁을 잠시 다녀가신 듯, 그저 꿈인 듯 아련하다. 비록 아슬롯사이트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여전히 가슴속에 살아계신 아슬롯사이트를 기억하고 그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회고록을 써야 했다. 그리고 아슬롯사이트 영전에 부족한 글이나마 바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우리 가족 모두가 받은 아슬롯사이트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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