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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r 16. 2025

나의 묵은 친구, 사이다토토

퇴직을 하고 '또 다른 항해'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나 온 세월의 발자취를 더듬는 날이 많아졌다. 그동안 잊었던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들도 새록새록 다가왔다. 갑자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의욕 만으로는 되지 않을 일이고, 정제된 언어로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민이 깊어 갔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베란다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사이다토토장을 기억해 냈다. 내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이다토토장은 모두 10권이다. 오랜 세월 이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챙겼지만, 사이다토토장 일렬번호를 볼 때 중학교 때 쓴 두 권이 분실된 게 분명했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친구였는데, 그 존재를 잊고 산 세월은 길었다. 온몸에 테이프를 두른 박스를 조심스레 뜯었다. 박스 안에서 잠자고 있던 내 오랜 친구들이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 깨더니, 많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방긋 웃는다.


그날 밤, 나는 내 묵은 친구, 사이다토토과 함께 꼬박 밤을 새웠다.언젠가 띄엄띄엄 읽어 본 기억은 있지만, 열 권 모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묵은 세월 냄새가 풀풀 피어오르는 사이다토토장들이 50여 년 전 아득한 세월 저편으로 나를 이끌었다.

사이다토토
사이다토토
나의 첫 사이다토토(좌)과 묵은 친구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첫 번째 사이다토토장은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와서 여름 방학숙제로 쓴 것이다. 시골 학교에서는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채집과 식물채집이 단골 메뉴였다. 그때도 사이다토토 숙제는 있었겠지만, 사이다토토를 쓴 기억은 없다.서울로 전학을 와서 처음으로 곤충과 식물 채집 대신 '사이다토토'를 쓴 것 같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꾹꾹 눌러쓴 사이다토토장엔 코흘리개의 천진하고 유치한 웃음이 묻어 있다. 낯선 서울에서 친구가 생기면서 천방지축 쏘다니던 촌뜨기의 서울 적응기가 그려져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거의 빼먹지 않고 그날그날의 일들을 적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 가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았던 얘기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어린 나이에도 빼먹지 않고 매일 사이다토토를 썼던 내가 신통하다. 중학교 2학년 사이다토토장은 영어 사이다토토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글 중간중간에 school, teacher, homework, today, study, water, mother and father 등 기초 영어 단어 몇 개 늘어놓고 영어 사이다토토라고 우기고 있다.봄학기 어느 날 사이다토토다.


Today는 spring이라서 날이 따뜻하다. school에서 teacher가 homework를 내줬는데 너무 많다. 따뜻해서 friend와 놀기 좋은 날인데, homework 때문에 놀지 못해서 짜증이 났다. teacher가 밉다......


참으로 기막힌 영어사이다토토다.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 당시 70년 대 학생들에게는 펜글씨가 유행이었다. 글씨를 반듯하게 쓰려면 펜글씨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삐뚤빼뚤 쓴 글씨가 또 한 번 웃음을 짓게 한다. 잉크로 찍어 쓴 글자들이 오랜 세월의 무게에 눌려 뿌옇게 번져사이다토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제법 성숙한 글이 시작되고 사이다토토. 사이다토토이 바뀔 때마다 '삶의 등불, 초원의 빛, 보름달, 내 마음' 등 표지의 제목이 바뀌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은 장편소설 심훈의 '상록수' 독후감이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을 읽고 나를 돌아보는 글이 보인다. 독서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또 조금은 유치하지만 자작 詩도 몇 편 남아 있다. 몸이 성장하듯이 글도 제법 성숙해 가고, 사춘기 다운 고민도 엿보인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싸워가는 부모에 대한 연민과 슬픔, 오르지 않는 성적과 대학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게 드리워져 있다.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설픈 질문을 던지고, 성숙하지 못한 나를 힐책하고 있다. 15촉 전등불이 깜빡이는 다락방에서 세상 고민 다 뒤집어쓴 듯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대학에 가서는 글 쓰는 빈도는 적어졌지만, 훨씬 현실적인 삶에 대한 고민의 농도가 짙어지고 사이다토토.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좌절과 방황, 목전에 다가와 있는 취업 문제와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던 순간순간들이 진하게 묻어사이다토토. 방황이 깊은 시절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본격적인 취업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사이다토토 좌절과 아픔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워가며 책과 시름하던 내 젊은 청춘이 그 안에 있다. 아직도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정을 위해 장남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죽도록 미워하고 자학하고 있다. 하사이다토토 독립된 인간으로, 버젓한 사회인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고,허허벌판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고 있는 나를 위로하는 글로 스물일곱 아픈 청춘의 사이다토토장은 끝을 맺는다.


새벽녘까지 읽어내려 간 사이다토토장에는 내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성장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 있는 글을 읽으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이 나를 웃게 했고, 때론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싶어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에선 울컥 눈물이 나고 가슴이 먹먹해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특히, 한 숟갈의 밥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도 단칸방을 전전하던 시절은 부모님과 나와 어린 두 동생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사이다토토를 쓰며 나와 가족을, 친구를, 미래와 세상을 생각하던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었다는 것을 내 묵은 친구, 사이다토토장은 말해주고 있다.


나는 오늘도 '또 다른 항해'를 하고 있다. 그 시절, '사이다토토 쓰기'가 유약했던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나의 '항해일지'가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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