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독립 獨立 : 홀로 서다
나의 산타카지노 능력으로 세계를 이해하다
나는 철학적 산타카지노의 결과로 나온 어느 특정 철학적 지식이나 이론을 얘기하지 않는다. 철학적 산타카지노가 작동하는 환경, 그 높이 내지는 그 효과 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철학적 산타카지노가 최초로 발생하는 시점 -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
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물" - 이 명제가 과학적으로 참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명제를 밝히기까지 그가 걸어왔던 산타카지노의 여정,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탈레스는 나일강의 범람이 신들의 다툼이 아닌 나일 강 밑에서부터 바람이 거슬러 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맞는 설명인지 틀린 설명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나일 강의 범람에 대한 해석의 층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범람의 원인을 바람의 방향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관찰하는 능력으로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생가하는 능력, 이것으로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을 탈레스가 최초로 했다.
그래서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중국 기나라는 주나라의 변방국이었다.
기우 (杞憂 -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의 유래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하는 기나라 사람에게 누군가가 안타까워서 이야기 해주는 내용이다.
하늘은 기로 쌓인것, 이세계는 기호 꽉 차있고 움직이고 숨쉬는 것은 기안에서 일어나는 일, 땅도 흙덩어리가 쌓인것, 사방이 다 흙덩어리로 차 있는데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에서 유래
과학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틀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여기에 새로움이 있다.세계가 신의 뜻이 아니라 '기'내지는 '흙덩어리'라는 자연 현상을 근거로 설명한다.산타카지노의 주도권이 인간의 독자적인 생각과 관찰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점점 이동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인간에게 있는 바로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바로 인仁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신화의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이동하다
철학의 시작은 신으로부터 인간의 독립을 의미한다.
신이 주도권일때는 신의 음성을 듣고 수행만하면 되었지만, 인간이 독립을 시도하면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역사에 책임성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인간이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넘어왔음을 뜻한다.
인간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산타카지노를 통해 이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이나 보편적인 존재 형식에 대해 말한 것이 '철학'이다.
미토스mythos의 세계에서 로고스logos의 세계로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로고스는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로고스를 발휘하면 신의 명령 그대로를 믿고 따르지 않고 생각하는 힘, 이성의 힘으로 이 세계를 설명하거나 해석한다. 로고스는 철학의 시작 지점에서 발견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철학은 영어로 필로소피philosophy다.사랑이나 애착을 뜻하는 단어와 지혜나 지성을 의미하는 단어가 합해져 '필로소피'가 되었다. 합성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따로따로 존재했던 두 단어가 합쳐져야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상황이 펼쳐졌음을 뜻한다. 새로운 상황은 신화의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넘어 가는 상황이다. 소피아라는 것은 로고스적인 지적 훈련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고독을 자초하다
철학의 시작으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이 핵심이다. '독립'은 기본적으로 혼자 서는 일이다.
독립할 때 인간에게 요규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고독'이다. 부정적인 의미로 '외로움'은 뭔가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이다.
고독은 아주 과아하게 혼자 서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힘만으로 서 있는 자립적 상태이다. 고독이나 독립은 기존의 인식 질서가 주는 강압적인 힘을 벗어나서 스스로 우뚝 서는 용기를 발휘해야만 가능하다.
새로운 생각이 시간을 견디며 생존하다가 어느 순간에 또 믿음의 대상이 바뀌고, 그 믿음의 체계가 다시 새로운 생각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란 결국 이런 형식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기존의 믿음 체계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다. 문명의 깃발로 존재하는 철착이나 예술은 다 고독한 존재들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불현해진다는 것은 이미 있는 생각들이 더 이상 나의 삼이나 새로운 문명을 책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과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철학적 산타카지노를 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고독을 자초해야만 한다.
질문하는 자는 예민하다
익숙함을 공유했던 주변의 연결망과 갑자기 끊어지고, '우리'에서 혼자만 벗어나 '이탈'하는 느낌이 든다.
기존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으로 그 문법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새로운 조짐이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예민하면 그것을 이상하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백지 상내에서 순수하게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다.
백지 상태란익숙한 논리나 문법 혹은 이미 배워서 가직 있던 지식을 폐쇄적 지배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독한 시선만을 남긴 상태이다. 배움을 통해 얻었던 내용에 구속되지 않고 해방되어 호기심만 가득한 원초적 심리 상태다.
'덕德'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고, '욕망'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내용도 자기를 구속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으로만 되어 있는 상태, 즉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섰다. 이때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고독한 사람, 독립적인 사람은 예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생각의 결과들을 믿음의 체계로 바꿔서 그것을 신봉하면서 산다. 이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만 세상과 접촉한다. 이때 인간이 상실하는 가장 큰 자질이 바로 '예민함'이다.
예민함은 인간을 통찰로 이끄는 매우 종합적인 직관의 터전이다.자신의 시대적 사명과 역사적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직관이다. 익숙함에 갇혀 있으면 절대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다. 익숙함에 갇혀 있으면 , 궁금증이나 호기심도 발동되지 않아 질문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인류 역사는 한번도 예외 없이 소수가 다수를 전복하고, 그 소수가 다수를 형성한 다음 다시 새로 등장하는 소수에 의해서 전복되는 과정으로 이어져왔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전체 흐름이다. 이것은 오직 예민한 사람에게만 읽힌다.
한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도 사실은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예민함의 차이다. 근대화(서구화) 물결이 시작되자마자 그 조짐을 읽고 빨리 대처한 일본과 느리게 반응한 조선의 차이다.
일본의 '과장된 위기의식' - 실제 내용보다 훨씬 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항상사태가 발생해야만 그때부터 대응하기 시작하는 습성이 있다. 이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재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당연히 예민함을 발휘해본 적이 없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습성이다.
제국의 차원 혹은 선진국 수준의 국가들은 이렇듯 과도하게 보일 정도로 예민하게 선제적 반응이다.
창조란 새로운 흐름을 포착한 상태에서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극한으로 몰입할 때 일어난다.
'자기로부터의 이탈'이 세계를 응시시하는 힘
한국학생 vs 미국학생 단체여행 - 한국학생은 철저히 집단 행동을 하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함께 있어야 한다.미국학생은 단체 프로그램이 아닌 이상 개인 행동을 한다.
어떤 모습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일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실재의 세계에서는 어느 것이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따져야 할 정도로 분리 되어 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건강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건강할 것이고,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더욱 건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다만 공동체나 집단에 선험적 절대성을 부여하게 되면 마치 공동체나 집단을 절대선을 가진 고정 불변의 존재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집단은 대개 '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다.
종속에서 벗어나는 일은 의식 있는 개별자가 역사적 책임성을 회복해야만 가능하다. 이는 자신이 독립적을 시대의식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자신만의 능력으로 세상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종속적인 사람에게는 질문보다 대답이 더 편하다. 질문은 집단에서 이탈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가능하다.
독립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이 강제하는 일반적인 이념과의 자발적인 단절이고 고립이다. 우선은 '우리'에서 이탈해 '나'로 서는 것이다.
집단에서 이탈해 나와 자신이 있는 현재 그곳을 마치 제3자가 보듯이 내려다본다.
자기 삶을 영위할 때도 자기 삶 속에온전히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삶 자체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이탈이다.
집단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은 단독자로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지 않으면 그 안에 매몰되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 고립을 자초한 후, 고독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독립적 주체는 능동성을 회복하고 진실한 내면을 외부로 확산할 힘을 갖는다.자기를 확산하는 활동이 시작되면 비로소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연결도 덩달아 시작된다.
'독립'적인 주체만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연결'과 '연대'를 할 수 있다. 독립적이지 않고 종속적인 주체는 이미 있는 이념에 빠져 그것을 지키는 데에만 힘을 쓰기 때문에, 그 이념으로 지탱하는 공동체를 정해진 모습 그대로 유지하려고만 하지 공동체의 질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돌출적인 시도를 못 한다.
독립, 고독-철학적 수준의 산타카지노를 가능
'연결', 그것은 '독립'적 줓만 할 수 있는 창의적 활동
독립은 분명 '연결'과 대척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차의적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스티브 잡스 "창의성은 연결이다." -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능력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다. 유사성을 근거로 상호 개방시켜 접속해보는 일이 연결이다. (은유)
'연결'과 '은유'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확장이 개시되도록 꿈을 꾸는 일을 상상이라 하고, 확장이 전개도는 일을 창의라고 하며, 확자아의 결과를 창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은유의 예 - 시간은 수다쟁이, 별과 밥
은유는 비틀기다. '밥'은 '별' 앞에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이 뒤틀리고, '별'은 '밥'을 맞이하려 스스로를 비틀어놓는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으르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남, 바로 창조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창조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축적된 과거가 죽음 같은 고정성에 제한받지 않고 은우를 통해서 생명력을 새롭게 부여받으면서현재를 뒤흔들어 미래를 향해 문을 활짝 열 수 있게 한다. 이건 마치 갇힌 지식이 열린 지혜로 바뀌는 일과 같다.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곳, 아직 오지 않은 곳을 볼 수 있게 되는 일과 같다.
기존의 틀에 갇힌 사람은 과거에 갇힌 사람이자 스스로를 과거화시키는 사람이다.
정해진 틀을 해체시키는 용기가 우선 필요하다.
장자의 이야기에 박에 대한 이야기이다. 박의 용도는 물바가로 쓰거나 호리병 역할인데 박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혜자는 박을 깨버렸다. 그걸 본 장자는 박이 크면 반으로 쪼개서 바다에 띄워 놀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낸다.
혜자 스스로는 자신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박에 대한 관념이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장자는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구속되거나 지배받지 않는다. 기존의 관념에 주인의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관념의 생산과 소비를 지배한다.
기존의 관념과 실재 세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기존의 관념을 새로운 세계에다 덧씌워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용도를 과감히 생산한다. 이것을 일컬어 창의적이라고 한다.
'연결'을 통해서 발휘하는 창의성은 기존의 정해진 관념과 과감하게 '단절'한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관찰과 몰입을 부른다
독립적인 인간은 대답에 빠지지 않고 질문한다.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그런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 누구와도 고유되지 않고 자신에게만 있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럽고 고유한 것이다.이것이 내면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자신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있는 힘 위헤 세운다. 정해진 어떤 이론이나 가치관, 어떤 질서에도 양보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자기이게만 하는 것 위헤 서 있을 때, 이 사람을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이때 발휘되는 그 사람만의 힘이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대개는 궁금증과 호기심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을 근거로 판단한다.
"이 물컵을 보세요!" - 정말로 그 물컵 자체를 보는 사람은 없다. 물컵을 보려면 판단하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냥 '저것이 물컵이지'라고 판단하고 시선을 이내 거두어들인다. 시선을 중간에 거두어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본다' 혹은'봤다'고 말할 수 없다.
관찰 - 사물에 접촉한 시선을 바로 거두어들이지 않고 거기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는 것.
모든 학문 활동이나 삶 속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하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은 관찰을 하고, 호기심이 작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익숙함이 생소해지는 순간의 번뜩임
대상에 대한 관찰이 집요해지면 그 대상도 무너지고 관찰하는 자신도 무너지는 단계까지 내몰린다.익숙했던 대상에서 갑자기 생소한 점이 보이고, 그것을 보던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낯설어진다. 생소함과 낯섦 앞에서 순간 당황하고 깜짝 놀란다.이 '깜짝 놀람'의 순간에 비로소 찰학적 시선이 작동한다.
유일하고도 고유한 것의 탄생이다.
철학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창조적 차원의 산타카지노가 발동될 때, 가장 근저에서 먼저 꿈틀대는 것이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인간을 가장 독립적으로 만들고 고독을 자초하게 한다. 고독하고 독립된 상태에서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힘. 그것이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탁월함으로 인도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지닌 채 진실하게 보고 집요하게 관찰하면, 대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며 흔들린다. 이때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생소함이 등장하고, 그러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경이'라고 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관찰자는 심리적으로 동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이'이다.
모든 철학서의 철학이 경이로부터 시작된다고 쓰여 있는 이유다. 경이로움 속에서는 가장 익숙했던 것이 가장 생소해진다.
기존의 지식과 이론에 근거해서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낯설어지는 실험을 감행한다. 철학은 여기서 출발한다.
홀로 밝은 빛을 보는 즐거움
자쾌 自快 - 나 자신만의 즐거움, 내안에서 내가 생산해낸 나만의 고유한 쾌락, 이것이 자유고 독립이다.
이 자유와 독립을 갖춘 주체가 자신의 힘에만 의지해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는 과정을 '철학한다'라고 한다. 이런 철학적 활동을 통해서만 새로운 빛을 볼 수 있다.
'변화'는 이틀에서 저 틀로 넘어가는 일이다. 현재의 틀은 나에게 익숙한 개념과 문법으로 모두 번역되기 때문에 매우 선명하고 분며아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 혹은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는 익숙한 개념과 문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지금 이 틀안에 있는 사람에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틀은 아직 암흑이거나 오리무중이다.
모든 창조적 행위자는 익숙한 문법 속에 있으면서 오리무중의 열리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다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문법을 먼저 예민하게 느끼고 반응한다. '오묘한 어둠'으로 있는 열리지 않은 세계 속에서 고요히 '홀로' 빛을 본다.
'참인간'은 오리무중 속에서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듣는다.
'홀로'남겨진 고독한 사람이 본 '밝은 빛'과 '조화로운 소리'는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다.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자쾌'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독립적 주체만이 할 수 있다.
세상과의 불화를 자초하는 것, 그것이 용기
지금은 왜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형성된 예민함이 상실되어가는가? 이미 있는 것을 습득하여 확대 심화시키는 일에만 열중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것을 믿고 수용하는데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할교에서는 생가하는 능력을 배양시키기보다는 주로 생각의 결과들을 숙지시킨다.
버트런드 러셀 - 나이가 들면서 가상놀이 공상이 희귀해지는 까닭은 모든 교육 과정이 그것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고는 분명히 전복적이다.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얌전하지 않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에 답답해하고, 스스로 그것들과 불화를 빚는다. 창조적 탁월함은 기존의 것들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독립적 주체는 불안을 편안함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불안 그대로를 감당한다. 그대로 품어버린다.
탁월한 인간은 항상 '다음'이나 '너머'를 꿈꾼다.
진정한 용기는 삶의 불균형을 과감히 맞이하는 것
나의 생각이 합리적인가 아닌가를 따진다고 할 때, 그 합리성을 증명하는 근거들은 이미 있는 것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합리성을 검증하려는 태도가 이미 있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게도 한다. 왜 생각이 꼭 합리적이어야만 하는가? 왜 기존에 있는 어떤 것들과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기존에 있는 모든 합리성으로부터 이탈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다.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자.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료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다. 꿈은 원래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이다. 지성의 훈련이 계속되면 객기와 용기는 나의 내면에서 충분히 분별된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
탁월함이나 소피아를 추구하는 철학적 인간은 자신을 기존에 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켜 고독하게 놓아둔다.그러면 그는 어느 순간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단계를 맞이한다. 이때 기존의 해석 방식을 수용하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만드려는 용기를 발휘한다면 합리성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다. 그보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말것인가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철학적 사고는 특권과 기성제도와 편안한 습관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차분한 균형 상태를 즐기기보다는 불안한 불균형을 과감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 불균형을 생산해야 한다.
철학은 산타카지노를 산타카지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산타카지노하는 것
선택의 적합성 여부를 분면히 하려는 것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느 정도의 수양을 거치고 적당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하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 투입해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면 거기에 몰립하는 일 외에 따로 고려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단련을 거쳐서 나온 판단이라면 그냥하면 된다.
자기가 선택한 길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자기가 선택한 길을 스스로 맞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견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꿈과 희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사실 누구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과거의 틀을 가지고 미래를 결정하면 안 된다. 꿈에 대한 합리적이고 분명한 예측을 하고 평가를 내리는 순간, 꿈의 동력은 오히려 상실된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지성을 고양시켜 실존적 조건을 이겨내면서 독립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독립성에 대한 열망이 크면 독립성이 확보될 가능성도 커진다. 기존 흐름과의 연결성이나 일관성을 지나치게 따지기 시작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 설득력이 있을까를 따지기 시작하면, 독립을 향한 용기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이론은 산타카지노가 아니라 산타카지노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산타카지노는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산타카지노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산타카지노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용기가 약해진다. 철학적 산타카지노 대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이고 당장의 세계가 아닌가.
이미 있는 모든 이론들은 세계에 접촉하려는 여행기에 봉사시키려고 데리고 다니는 노비다. 부디 그것들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