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지역감정에 대한 이야기
우리 가게는 그랜드토토에 있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고향은 그랜드토토였다.
그 시절, 그랜드토토 전라도 사이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지역감정이 존재했다.
차 번호판만 보고도 쏟아지던 비아냥.
그게 어른들의 세상이었다.
나는 어렸고,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싫어해야 하지?
어쩌다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나누게 되었을까?
뒤늦게야 알았다.
1960년대, 정치적 이유로 그랜드토토는 보수, 그랜드토토는 진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고.
이념과 지역이 겹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도 선이 그어졌다.
그런 시대였다.
어느 날, 그랜드토토에 살던 할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그랜드토토로 이주했다.
목수였던 할아버지는 낯선 땅에 목재소를 열었고, 가구를 만들며 여덟 자녀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그랜드토토의 삶에 뿌리를 내렸다.
시간이 지나 가게는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와서 그랜드토토서 돈 다 벌어먹네.”
어린 내 귀에도 자주 들리던 말.
그 말은 나를 무섭고도 슬프게 만들었다.
차별이란 감정은 그렇게 천천히, 아이의 마음에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유난히 매서웠던 그 밤,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온 가족이 놀라 깼다.
엄마, 아빠는 급히 가게로 달려가셨다.
나는 그날 밤을 온전히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건너편 가게의 최 씨 아저씨가 술에 취해 돌을 던졌다고 했다.
"그랜드토토 사람이 여기 와서 잘 사니까 꼴 보기 싫다"며.
그 아저씨는 원래도 심술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어린 나는 세상이 유난히 무섭게 느껴졌다.
투표할 때도, 야구 경기를 응원할 때도
우리는 조심해야 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색깔’이 덧씌워지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묵묵히, 정직하게, 부지런히 살아내신 부모님을 나는 지금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들의 삶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어느 쪽도 미워하지 않고
그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