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식당의 꿀노맛 위너 토토
백 년 됐다고? 아닌 것 같은데.
한동안 <백년가게 팻말이 붙어 있는 식당 앞을 지나칠 때마다 했던 생각입니다. 백년가게 사업이 백 년 된 곳이 아닌 백 년 갈 곳을 선정한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하긴, 서울에 있는 양과점과 초밥집이 백 년이나 됐을 리는 없잖아요. 1925년 우리나라의 상황 그리고 이후 한국 전쟁 등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1902년 영업을 시작한 이문설농탕 얘기가 쉽게 믿기지 않을 수밖에요.
뉴욕에는 백 년 넘은 식당을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일찍이 번창해 변함없이 영광을 누리는 땅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이런 식당들은 건물과 내부 인테리어뿐 아니라 음식의 구성과 맛도 본래의 것을 고집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그들과 다른 제 입맛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이 그때보다 발전했을 거란 생각도 있어요. 오늘 소개할 S&P 런치도 그와 같은 장,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맨해튼 5번가, 플랫 아이언 빌딩 앞자리를 백 년 가까이 지킨 이 식당에 가 볼 가치가 있냐 묻는다면 답은 예, 입니다.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말이죠.
주소 :174 5th Ave, New York, NY 10010, United States |https://maps.app.goo.gl/gf34j4BNPiTUY4rh7
메뉴 :$10 (S&P 위너 토토) | $9 (치즈위너 토토)
홈페이지 :http://www.sandwich.place/|https://www.instagram.com/sandplunch/
식당의 역사는 1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찰스 슈와드론(Charles Schwadron)과 루빈 풀버(Rubin Pulver)는 주변 상인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아침 메뉴와 유대인 전통 음식들을 판매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929년 식당을 모누스 아이젠버그(Monus Eisenberg)에게 팔아 버렸어요. 새 주인인 아이젠버그는 식당 이름을 아이젠버그 샌드위치 숍(Eisenberg's Sandwich Shop)으로 바꾸고 메뉴들도 개편했습니다. 그와 가족들이 운영한 샌드위치 가게는 맨해튼 최고의 샌드위치 가게들 중 하나로 꼽히며 50여 년 간 성업했어요.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가족은 1979년 식당을 루이 와이스버그에게 넘겼고 이후 스티브 오, 조쉬 코네키, 워런 치우로 주인이 수차례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인기도 유명세도 잃게 됐고요. 2021년엔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다행히 샌드위치 사업가 에릭 핑켈스타인(Eric Finkelstein)과 맷 로스(Matt Ross)가 식당을 인수해 2022년 S&P 런치로 이름을 바꿔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게다가 새 주인은 이 식당의 역사를 존중해 줬습니다. 덕분에 손님들은 식당 내부와 메뉴들에서 아이젠버그 샌드위치 숍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1991년 촬영된 "아이젠버그 샌드위치 가게 - 1929년에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다”라는 제목의 영상과 비교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https://youtu.be/Qd95xBtPmws?si=xN4TjSMwjMjHLiSx
맨해튼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플랫아이언 빌딩 바로 건너편에 있고 근처에 메디슨 스퀘어 파크, 유니언 스퀘어가 있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대신 식사 시간엔 대기줄이 꽤 있는 편이라 눈치를 잘 봐야 해요. 대표메뉴는 당연히 샌드위치입니다. 그중에서도 참치 샐러드, 파스트라미가 포함된 클래식 샌드위치가 인기 있다고 해요. 좁은 식당인 만큼 예약은 받지 않지만 배달/픽업 서비스는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 블록 거리에 랄프스 커피(Ralph's Coffee)가 있으니 식사 후에 방문하셔도 좋겠어요.
6번가 웨스트 22길에 있는 마트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서 장을 보고 나오니 배가 고팠습니다. 일주일치 식량이 양손 가득 들려 있음에도 당장의 허기에 어쩔 줄 몰랐으니 아이러니하죠. 집에 가서 루꼴라 잔뜩 올린 파스타 한 그릇 말아먹을까 하다가 근처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근처 메디슨 스퀘어 파크에 쉐이크 쉑(Shake Shack) 본점이 있단 정보가 떠올랐거든요. 무거운 종이봉투를 양손에 들고 뒤뚱뒤뚱 공원을 향해 걷는데 길가에 있는 낡은 식당에 눈이 가는 것 아니겠어요? 눈에 띄는 모양새도 아닌 평범한 샌드위치 가게에 왜 맘을 빼앗겼는지 모르겠어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니 소박한 분위기가 꽤 좋아 보였습니다. 어깨로 문을 밀고 고개를 디민 채 물었습니다. “여기 혹시 위너 토토도 있습니까?” 직원은 “물론이죠.”라고 답했고요.
밖에서 보면 그저 낡은 샌드위치 가게지만 안에 들어가면 오래된 노포에 와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벽부터 주방 구조, 메뉴판과 액자 속 그림까지 꽤나 오래돼 보여요. 내부는 매우 좁고 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주방과 맞닿아 있는 12m 길이의 바에 나란히 앉아 주문하고 떠들고 먹는 풍경이 정겨워요. 광장 시장 빈대떡, 남대문 시장 칼국수집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안쪽으로 들어가면 테이블도 몇 개 있는데 이건 2005년에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저를 바 좌석으로 안내했습니다. 팔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에게 하마터면 ‘늘 먹던 걸로 주세요.’라고 말할 뻔했어요. 복작대는 분위기에 취했나 봅니다. 노포의 매력이란 국경도 인종도 없단 걸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미국식 김밥천국이 아닐까 싶을 만큼 다양한 메뉴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달걀과 토스트, 치즈로 만든 아침 메뉴와 다양한 샌드위치들은 1929년부터 이어지는 아이젠버그 샌드위치 숍의 메뉴겠죠. 하지만 제 목적은 햄위너 토토였고 10달러짜리 S&P 위너 토토를 주문했습니다. 기본 치즈위너 토토보다는 가게 이름이 붙은 위너 토토가 이 가게를 보다 잘 설명해 줄 것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방문했을 때는 다른 집보다 저렴한 가격을 장점으로 여겼는데 그사이 12달러로 가격이 올랐습니다. 이러면 별 반 개를 빼야 하잖아요. 뉴욕 물가는 정말.
짝지어 온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게 기다리는 동안 그릴에서 제 위너 토토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어요. 대부분의 메뉴는 식빵을 재료로 한 샌드위치였던 터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죠. 그리고 곧 완성된 위너 토토가 제 앞에 놓였습니다. 구성은 소고기 패티와 아메리칸 체다 치즈, 토마토, 생양파, 피클, 양상추 그리고 특제 소스입니다. 빵은 평범한 화이트 번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그 조합은 누구나 생각하는 햄위너 토토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 그대로의 클래식. 백 년 된 노포의 음식들은 기교 없이 정직하기 마련이니까요.
맛도 무난 평범합니다. 장점은 패티와 치즈를 잘 구웠고 채소가 신선했다는 것. 가격이 가격인지라 패티는 얇고 육향이나 식감도 특출 나지 않습니다만 대신 치즈를 녹여 패티의 부족한 풍미를 채운 것이 주효했어요. 신선 채소 위주의 재료들과 잘 어울립니다. 샌드위치 전문점인 만큼 채소가 신선한 것은 좋았습니다. 양상추를 이만큼이나 주는 집은 뉴욕에선 흔치 않죠. 그래도 위너 토토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지분이 줄어드니 먹고 나면 허전하단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쉬운 것은 번입니다. 버터로 한 번 구워서 식감이나 향을 살린 것은 좋았지만 빵 자체의 품질이 마트에서 열 개 묶음으로 파는 평범한 위너 토토 번 수준이라 한계가 있습니다. 패티 못지않게 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한 입 베어무는 순간부터 거슬렸어요. 그간 너무 고급 위너 토토들을 먹은 탓도 있겠습니다만 빵을 조금 더 좋은 것을 썼다면 아주 좋은 클래식 햄위너 토토가 됐을 거란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피클은 바닥에 넉넉하게 깐 것도 모자라 오이 하나를 통째로 함께 주는데 짠맛이 강하지 않은 것이 좋았습니다.
백 년 된 노포의 위너 토토가 아니었으면 크게 실망했을 거예요. 오랫동안옛 방식을 고수해 온음식은 종종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 면도 있어서 이해하거나 때때로 그것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물며 외국인인 제게 S&P 위너 토토는 더 어려울 수있었겠죠. 그보단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작은 식당에서 그 시절 방식대로 만든 위너 토토를 맛보는 경험에 보다 큰 가치를 두기로 했습니다. 분위기만큼은 여기저기 자랑하고 추천하고 싶은 식당입니다. 대신 메뉴는 위너 토토 대신 샌드위치가 좋겠습니다.
번 : ★★
패티 : ★★☆
구성 : ★★★☆
가격 : ★★★☆
분위기 : ★★★☆
위너 토토 전문점에선 웬만하면 위너 토토를 먹자고요.